인천의 유래와 연혁

인천의 지명변천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인천의 지명변천을 안내합니다.

  • 2014-05-23
  • 제공부서 : 문화재과

한국이민사박물관

2003년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우리 선조들의 해외에서의 개척자적인 삶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인천광역시 시민들과 해외동포들이 함께 뜻을 모아서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사박물관입니다. 우리나라 첫 공식 이민의 출발지였던 인천에 한국 최초의 이민사 박물관을 건립함으로써 100여 년의 한인 이민역사를 체계화 할 수 있는 기반이 비로소 마련되었습니다.

  • 2013-10-23
  • 제공부서 : 한국이민사박물관

대한민국 이민사

산업화, 세계화 1962~현재<br /> 1962 대한민국 정부, 해외이민법 제정 계획 농업 이민 17세대 92명, 브라질 이주<br /> 1965. 06 한일기본조약 조인. 1965 한국 간호사 10,371명, 독일 병원 초청으로 취업하면서 정착(~1977)

  • 2013-09-27
  • 제공부서 : 문화재과

이민자의 마지막 고국땅, 인천

인천항은 고국을 떠나는 회한의 눈물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기대감이 교차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바로 고국을 떠나 하와이로 향하는 첫 이민단 121명이 1902년 12월 22일 겐카이마루(玄海丸)를 타고 인천항을 떠나 일본의 나가사키를 향해 출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나가사키에서 신체검사를 받은 후 증기선 갤릭(Gaelic)호를 타고 요코하마를 거쳐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후 고된 노동의 이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 2013-09-27
  • 제공부서 : 문화재과
광복이후 인천의 항공사진

광복이후 인천

광복 후 한동안 우리 나라는 나라 이름마저 각양각이하게 부를 정도로 다양한 성향의 정치세력들이 난립하여 혼란을 거듭하였다. 미군이 가장 일찍 진주하였다는(9월 8일) 인천지역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군정(美軍政)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경제를 지향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인천지역사회는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 2013-09-27
  • 제공부서 : 문화재과
일제 강점기 인천의 한 어촌마을 전경

일제 강점기의 인천

일본의 식민지경영이 강화되고 대륙침략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일반인 이주자가 크게 늘어 공단과 거주지를 건설하고, 김포&middot;부평평야를 절대농지로 하여 식량공급지로 삼았다. 이로 위해 인천부는 1910년의 부역, 곧 옛 인천도호부의 부역에다가 부평군의 일부까지 차지하는 넓은 부역을 갖게 되었다.

  • 2013-09-27
  • 제공부서 : 문화재과
개항이후 제물포 전경

개항이후 인천

제물포 개항은 인천지역사회에 또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외세의 진입과 이질적 문물의 유입에 따른 갈등에서도 그러하였지만, 그 보다는 일본이 원인천을 한국식민지 경영의 발판으로 삼은 데 있었다. 청&middot;일전쟁(1894~1895)과 노&middot;일전쟁(1904~1905)을 치르면서 한국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 일본은 우선 제물포와 한성(漢城)을 잇는 도로와 철도를 부설하고(1899) 이들과 연계되는 항만의 확장&middot;수축에 착수하였다(1906).

  • 2013-09-27
  • 제공부서 : 문화재과
사당

조선시대의 인천

고려왕조에 이은 조선은 유교지치주의(儒敎至治主義)를 내걸고 대내적으로는 자급자족적인 토지경제와 유교적인 교화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명나라와 같이 해금책(海禁策), 곧 쇄국정책을 폈다. 따라서 황해의 해상교통이 전면 금지되었음은 물론, 내&middot;외국인의 왕래가 극도로 규제되었고, 귀화하지 않은 외국인들은 모두 추방되었다. 사신의 왕래와 대외무역으로 번성하였던 인천지역 사회도 자연 그 기능을 상실하면서 평범한 농&middot;어촌으로 변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 2013-09-27
  • 제공부서 : 문화재과
안남도호부

고려시대의 인천

인천지역사회가 경험했던 해상교통의 거점으로서의 역할은 대외관계에서 매우 개방적이었던 고려왕조가 개성에 도읍하면서 더욱 확대&middot;촉진되었다. 일찍이 해로를 통한 대외무역에서 뛰어난 활동을 보였던 고려 왕실은 개성에 이르는 수로(예성강) 입구에 위치한 강화&middot;교동&middot;자연도 등을 중심으로 대외교통의 거점을 개발&middot;정비하는 한편, 이를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원하면서 수도 개성의 남방지역을 방어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부평[수주(樹州)]에 설치한 것이다.

  • 2013-09-26
  • 제공부서 : 문화재과
강화 고인돌

선사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

인천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동틀 무렵, 이미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강화도를 비롯한 인천지역 곳곳 에서 구석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이들의 사회적 문화적 유산은 신석기&middot;청동기시대를 거치는 동안 날로 새롭게 축적&middot;확장되어 기원 전 1세기 경에는 ‘미추홀(彌鄒忽)’을 건설하도록 하는 기반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 2013-09-26
  • 제공부서 : 문화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