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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식

해방이전의 인천여성의 삶과 역사

담당부서
여성정책과 (440-2874)
작성일
2013-10-11
분야
복지
조회
5762
인천여성 발전사



인천이라는 지역 명칭은 조선조 태종 13(1413)년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곳은 비류(沸流)의 도읍지로 최초의 이 고을 명칭은 미추홀이었다.


그 후 삼국시대에 이르러서 고구려는 이곳에 매소홀현(買召忽縣)을 두었고 고려시대에는 인주(仁州)로도 불리었다. 고려시대 최대 벌족인 인주 이씨의 본거지가 인천이었고, 왕의 외향(外鄕)이거나 왕비의 내향(內鄕)이어서 가문의 영광과 함께 인천은 번성해 갔고 그 명칭도 인주, 경원군(慶源郡),경원부(慶源府)로 된다. (인천직할시사편찬위원회, 상권, 1993).



이곳에 고대 국가가 성립되기 전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음은 이곳에서 발굴되는 토기로 짐작할 수 있다. 여성은 구석기시대 이래로 풍요의 상징으로, 대지모신(大地母神)으로 숭배되어 왔고 또한 고대 농경사회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청동기 내지 철기시대가 되면서 철제 농기구와 무기를 효율적으로 지배한 남성들에게 차츰 예속되게 되었다.왕이 중심이된 왕족과 귀족이 지배계급이 되고, 평민과 노예계급이 있었던 계급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은 극히 예외적이었다. 따라서 여성은 자신의 능력과 지식에 따라 그 지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나 남편 또는 자손에 의해 지위가 결정되었다.


 

해방 이전의 인천여성의 삶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조 이후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너무도 그 기간이 방대하여 인천이 개항된 1883(고종20)년부터 1920년까지, 그리고 그 이후 1945년까지로 구분하여 여성의 삶을 조명하고자 한다.




근대화 초기의 인천여성의 삶의 변화



오랜 쇄국정책 끝에 1882(고종19)년 5월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8월에는 청국 이어서 서양 여러 나라와 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되고 여러 나라와 맺은 수호통상조약의 호혜원칙에 따라 인천은 여러 나라에 개방되었다.



가. 개항기의 인천의 근대화


인천은 개항이후 일찍부터 수도의 관문이란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국제항으로 발전하였고, 서구 문물의 수입 등 우리나라

근대화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1895년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비를 살해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내륙지방에서 쫓긴 일본상인들은 대거 인천항에 집결하였고 그 당시 인천의 일본인의 수는 한국 사람과 비슷한 정도이었다. 일본 상인들은 계림장업단(鷄林漿業團)을 조직하여 상권을 장악하려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1884년부터 내항한 청국인의 수도 상당히 많았다(인천직할시사편찬위원회, 상권, 1993)

1899(광무 3)년 경인철도 부설권이 우여곡절 끝에 일본에 넘겨지고 1900년부터 개통됨에 따라 서울지방과 인천과의 유대관계는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개항이 되면서 우리 나라는 전통적인 관습을 고수하려는 수구파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려는

개화파 간의 갈등 속에 서서히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다.



나. 여성 교육기관의 설립


전통적 사회에서의 여성교육의 목적은 유교적 부덕(婦德)을 함양시키는데 있었다. 따라서 제도적 교육기관이 아닌 가정교육을 통하여 수신(修身)에서부터 시댁 식구에 대한 예절, 자녀교육, 가정관리에 이르기 까지 여성생활에 필요한 실제적인 내용을 세심하게 가르치었다. 천주교를 비롯한 외래 기독교는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선교사업으로 여성교육의 산파역을 맡게 된다.



1886년 서울에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 설립된다. 인천에서는 아펜젤러(H.G.Appenzeller)가 1885년 7월 19일 공중예배를 봄으로써 인천의 최초의 교회인 내리교회가 세워지고, 제2대 목사 조원시(趙元始, G.H.Jones)부부의 부임으로 인천에서의 학교교육이 비롯된다. 1892년 4월 30일 죤스부인이 한 여아를 자기 집에서 교육한 것이 학교교육의 시작이고 이것이 인천영화학당의 태동이었다. 죤스목사는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의 교사를 겸하다가 내리교회 목사로 부임했고, 그의 부인은 스크렌톤(M.F.Scranton)여자 선교사와 함께 이화학당의 교사로 있었다. 1905년 두 여학생을 더 얻게 되었는데, 그들은 아주 가난하여 생활비를 보태주기도 하였다. 죤스여사는 산수, 영어, 찬미가를 최헬렌(Mrs. Helen Choi)은 한문, 국문, 성경, 지구약론, 붓글씨, 바느질을 가르쳤다. 영화여학당은 1900년 4월 2일 안골(內洞)예배당 뒷방으로 옮겨졌고 그 당시 학생수는 7명이었다. 교육과정은 1895년에 공포한 소학교령에 준한 교과목이었고 이에 몇과목을 보충하여 중등 정도의 교육을 실시하였다.(인천직할시사편찬위원회, 상권, 1993).이 학당에는 제물포 출생의 김활란(金活蘭), 서은숙(徐恩淑), 김애마(金愛麻)등이 수학하였고, 이들 교육 받은 신여성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기독교의 만민평등 사상은 계급타파와 남녀평등 사상을 고취시켰고, 신문화를 통하여 세계문화에 접하게 되면서 전통사회의 여러 모순이 지적되었다. 특히 여선교사들의 활동에 깊이 영향받아 여성의 사회진출 의욕은 강해진다. 1894년 단행된 갑오경장은 교육사적 측면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근대적 학교제도가 수립되고 서민대중에게 처음으로 교육이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여성교육에 대한 관심은 전혀 표명조차되지 않은 상태이었다. 1895년 9월 여학교 설립을 목적으로 서울에 찬양회라는 부인회가 조직되어 ‘여학교 설시 통문’을 발표하였다. 이 부인회는 대부분 양반 계급의 부녀자로 교육열이 높고 해외에서 신학문을 익힌 지식여성도 포함된 고상한 품격을 지닌 부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이 발표한 선언문은 단순히 여학교 설립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서구사회와 같은 남녀평등권의 획득,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 여성의 인격적 자아각성, 이를 위한 행동지침을 포함하고 있었다/women



1905년 11월 17일 강제로 체결된 보호조약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와 식민화교육이 시작되었다.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인천 등 전국 10여곳에 이사청을 설치했다. 통감부의 교육방침은 우리민족 우민화정책, 점진적 동화정책, 일본어 보급정책, 친일교육 정책으로 집약될 수 있다. 애국지사들은 우리 나라가 치욕을 당한 원인이 신학문을 보급하여 국가와 민족을 근대화하지 못한 점에 있다고 보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민족의식을 갖도록 촉구하였다. 사학의 설립은 교육구국운동 바로 그것이었다. 한국을 식민화하려는 통감부는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사학을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영화여학교도 보통 학교령과 사립 학교령에 따라 개편되었다.



다. 가족관련법의 변화


모든 사람을 하늘같이 대하라는 인내천(人乃天)사상을 바탕으로 한 1894년의 동학혁명은 개혁안건을 제시하였는데, 그 중에는 문벌의 타파, 노비제도의 폐지와 더불어 ‘청춘과 부에게는 개가를 허용할 사’란 조목도 있었다.

동학군에 의해 대표된 국민의 뜻은 당국자에게 각성을 주어 갑오개혁에 많이 반영되었다. 갑오개혁 안건 중에는 청춘과부에게 개가를 허할 것, 일본 사람과 간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갑오후에도 개가한 사례는 드물고,재가녀와 혼인하여도 그 사실을 숨기려 하였다(배경숙,1988).



조선조에는 신분이나 가족관계에 관한 단일법전은 없었다. 중국 명률이나 청률을 본받은 내용들이 여러 법전에 산재되어 있었다. 1905(광무 2)년 공포된 형법대전은 근친혼 금지, 동성동본 혼인금지, 오출사불거(五出四不去)의 이혼원인을 규정하는 등 근대적 법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단행규범으로 ‘과부 재가를 자유롭게 하는 건’, 1907년의 ‘조혼 금지의 건’이 있었다.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고 1912년 조선민사령이 제정되어 일본민법의 일부가 의용되었고, 민법 중 능력, 친족 및 상속에 관한 규정은 조선인에 적용하지 않고 관습에 준거 할 것을 명시한다. 그러나 한국에 개화가 진행되면서 종래의 관습이 부당하게 느껴지게 되었고, 1921년부터 일본 민법이 의용되었다. 일본 민법상의 처 무능력제도는 종래 무제한하게 관습적으로 가해지던 처의 예속적인 지위에서 보면 성문법상에 열거된 사항에 한정되었다는 점에서, 또한 남편의 일방적인 기처로부터 처의 재판상의 이혼청구권이 성문으로 인정되었다는 점에서 과거의 7출의 이혼원인에 비하면 합리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배경숙,1988)


 

1920년부터 해방까지의 인천여성의 삶



1919년 3.1운동은 2천만 조선민족은 물론 간도지방,러시아, 미주 하와이, 일본 등지에서 나라를 잃고 유랑하며 살던 약 2백만 해외 조선민족이 참여한 거족적 민족운동이었다.

인천지역은 개항이래 일본인이 많이 거주한 관계로 사전 단속이 철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5월까지 독립만세 시위는

계속되었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형식적으로 무단(武斷)정치를 은폐하고 문화정치를 실시하였다. 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고 개벽, 폐허 등의 잡지와 여성잡지로 여자시론(女子時論), 신가정, 신여자, 신여성현대부인근우(槿友) 등이 발간되어 여론을 선도해 갔다. 신문, 잡지가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을 유도해 나갈 수는 없었으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실력양성과 단결을 호소하여 이에 영향받은 많은 청년운동 단체들이 형성되었다.



가. 여성운동단체의 조직


인천의 여성들은 3.1운동 이후부터 민족연대 의식을 갖고 사회참여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청년운동 단체에 가입하거나 여성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신사상을 받아들이고 경제적 권리를 획득하는 등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내리교회에 인천여자엡?청년회가 회장 안인애(安仁愛),부회장 김영원(金英媛),전도부장 김신영(金信永),문학부장 김메블, 음악부장 김산라로 조직되어 1921년부터 교회 및 사회봉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5년 정남옥(丁南玉), 손단(孫丹), 장옥란(張玉蘭)등의 여성이 모여 인천여자청년동맹을 조직하려 하였으나 경찰의 압력으로 실패하고 인천여자청년학술연구회를 창립한다(조찬석,1996). 당시의 많은 청년운동 단체들은 가난한 아동을 무보수로 가르치거나, 소비절약과 물산장려, 여자교육의 필요성, 신학문에 대한 자극과 일반대중에 대한 교화, 계몽을 위한 강연회를 개최하며, 실업을 천시해온 과거의 폐풍을 타파하고, 일제의 수탈 앞에 항거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제적 자립에 도움을 주는 경제적 지식보급에 노력하며, 근검과 저축을 장려하고 특히 부업을 장려하는 일이 많았다. 인신매매의 폐지, 혼인 및 이혼의 자유권 획득, 여자의 해방,인습적 악습 폐지 등을 주장하기도 한다(조찬석,1975).민족의 정치적 역량의 총집결로 민족전선을 결성한다는 기치아래 청년운동 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고, 1927년 인천 출신 김활란 ,유각경, 최은희, 황신덕 등이 구성의 산파역을 담당하여 근우회(槿友會)가 조직된다. 근우회는 본부를 서울에 두고 통일적이고 조직적인 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나. 항일 독립운동의 전개


1920년대에 와서 학생들의 동맹 휴교를 통한 항일운동은 계속되었고,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은 그 절정을 이룬 사건이었다.

일본의 황민화 교육정책은 학생들의 저항의식을 더욱 자극하였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제정된 조선교육령 제3차 개정은 명목상의 조선어 교육을 제외하곤 교과과정을 일본의 것과 동일하게 만들었다. 황민화교육은 더욱 강화되어 일상생활에서의 일본어 사용, 신사참배, 황국신민 서사제창 등을 강요하게 된다. 이를 거부한 많은 학교가 폐교 처분을 받게 되었다.


 

쌀의 일본 수출이 많았던 인천항 주위엔 정미소가 많았고 이들 정미소 노동자와 인천부두 노동자들의 노동쟁의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또한 당시 성냥공장도 많았는데 1926년 4월 금곡리(현재의 금곡동)의 조선인촌주식회사에서는 임금인하에 반대하는 파업이 한달 가량 계속되었다. 단순한 임금투쟁이 아니라 일본인 감독의 성적 희롱에 대한 여성노동자의 항의 파동이라는 점에서 여성 권리 의식에서 비롯된 운동으로 볼 수 있다(경인일보,제12008호)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되자 징병제, 징용제 그리고 여자 정신제 제도가 제정되었다.1944년에 이르러 ‘여자정신근로령’을 공포하여 징병제와 동일한 강제동원 체재로 법제화하였다. 여성교육은 이로 인해 부재상태가 되고 정신대에 끌려 가는 것을 모면하기 위하여 인천은 물론 전국에서 여성의 갑작스런 조혼사태가 일어난다.



다. 인천출신 여성의 활약


김활란(1899-1970)은 영화여자학교에서 수학하고, 192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예과 및 고등과 교수로 재직하다 1924년 미국에 유학, 웨슬리언 대학, 보스톤 대학원을 거처 1931년 콜럼비아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9년~1945년까지 이화여전 교장, 동교 재단이사장을 역임한다. 서은숙(1900-77)은 인천 율목동 출신으로 인천영화여학교를 거쳐 이화학당, 미국 신시내티 사범대학, 콜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을 이수하고 1941년 이화학당 재단이사직과 함께 교수로 취임한다. 김애마(1903- )는 1911년 영화여학교를 거처 1924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이수하고 동교 사범과를 마친 후 미국 내셔날대학 졸업, 1940년 경성여자전문학교 보육부장으로 활약한다.김영의(1908-86)는 1920년 영화여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음악과를 마치고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 31년-35년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 35년 미국 뉴욕의 쥴리어드 음악학교에서 이수하고 다시 교수로 복귀하였다.

박창례(朴昌禮)는 인천의 창영학교를 거처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2년 수료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2년과정을 수료하였다. 가난으로 인한 수학의 어려움을 절감하여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을 대상으로 교육사업을 편다. 도원동 보각사 강당 일부를 빌려 당시 성냥공장과 정미소에서 일하는 여공 100여명을 모집하여 야학을 실시했으나 일경의 탄압으로 6개월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각계의 유지로부터 기부를 받아 교사를 신축하여 1929년 동명학원을 세웠다. 그러나 한글을 비롯한 민족교육을 한다고 하여 일경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1966년 소년한국일보 제정, 훌륭한 어머니상을, 같은 해 제2회 경향신문 교육상 도덕정서교육상을 수상했고, 1982년 한국일보 제정 제1회 교육대상을 수상했다(인천직할시사편찬위원회,하권,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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