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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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맛-겨울빛 담긴 투명함, 벌버리묵
겨울빛 담긴 투명함,벌버리묵인천만의 ‘그 맛’이 있다. 지역 음식에는 고유한 환경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끝낼 일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인천의 산과 들에서 자라고, 바다와 갯벌에서 펄떡이고 있을 먹거리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손맛을 기록한다. 그 여섯 번째는 겨울을 닮은, 맑고 투명한 맛 ‘벌버리묵’이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벌버리묵(아래)과 그 원재료인 박대 껍질(위 오른쪽), 그리고 박대. 스타일링 진희원 ‘그 많던 박대는 다 어디로’ “거의 우리 바다 것이 아니야.” 무의도 큰무리 마을 바닷가, 일광욕하는 생선들을 가리키며 마을 주민이 말한다. 대부분 먼바다에서 나 연안부두를 거쳐 이 섬으로 왔다고 했다. 길어야 석 달, 겨울에만 맛볼 수 있는 별미가 있다고 해서 섬까지 왔다. 바로 영종도, 무의도 앞바다에서 잡히는 생선 박대의 껍질로 만든 벌버리묵. 박대 맛이 가장 좋을 때는 겨울에서 봄. 더구나 날이 따듯해지면 생선 껍질이 흐물거려 묵을 쑤기 어렵고, 애써 만들어도 금방 녹아버린다고 했다. 추울 때 벌벌 떨면서 먹는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도 ‘벌버리묵’.계절의 별미를 찾아 여기까지 왔는데, 원재료가 섬 앞바다에서 잘 나지 않는다니. 박대뿐 아니었다. 그물을 던지면 척척 잡히던 전어도 숭어도, 그 흔했던 망둥이도, 지천으로 널려 있던 굴도 바지락도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옛날에는 그리 어마어마하게 그물에 걸려들더니 이제 구경하기가 힘들어.” 옛 큰무리 선착장 인근에서 식당을 하며 생선을 말려 파는 주민 신정
2020-02-04 2020년 2월호 -
무의도 식도락
바다 한가운데 오롯이 핀 섬의 맛무의도舞衣島, 그 모습이 마치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춤추는 무희 같은 섬. 전어, 숭어, 민어, 우럭, 조기… 무의도 바다는 늘 만선으로 출렁였고 땅은 풍요로웠다. 산이 좋아 영지, 느타리 등 자연산 버섯과 약초 등이 나고, 갯벌에서는 굴이며 낙지, 바지락이 널려 있었다. 그로 인해 육지와는 다른 섬의 식문화가 오롯이 피어났다. 바다와 땅의 기운을 고스란히박대구이와 손두부 무의도 사람들의 삶이 맞대어 있던 곳은 바다뿐이 아니다. 주민들은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때론 호미질을 하며 부지런히 삶을 일궜다. 무의도 토박이 이안종 어르신은 섬의 땅과 바다가 풍요롭던 시절을 생생히 기억한다. “1970, 80년대까지도 벼, 콩, 고구마, 감자 할 것 없이 농사를 많이들 지었어. 지금 섬 곳곳에 펜션이고 뭐고 건물들 올라선 데가 다 논이었지.” 개발에 땅을 잃은 후로, 아내는 무의도 콩 대신 딸이 사는 강원도 영월에서 나는 콩으로 두부를 빚는다. 콩은 일고여덟 시간 불려 솥에 넣고 끓여 콩물을 진하게 내고, 해수로 간해 바다의 풍미를 더한다. “옛날엔 집집마다 두부를 해 먹었어. 두부 만드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야. 그래도 섬에서 오래 살고 먹어본 사람이 만들어야지. 누가 할 사람이 있나?” 식탁 위에 한 상 차려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손두부와 따끈하게 구워낸 박대가 먹음직스럽다. 김치에 싼 두부 그리고 생선살을 한 점 크게 떼어내 입안에 넣는다. 담담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한가득 퍼져 나간다.다정식당 중구 대무의로347번길 1(무의도 포내교회 옆) 계절마다 다른 섬의 맛굴밥과 굴국 칼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재야의 숨은 고수를 만난 느낌
2020-02-04 2020년 2월호 -
인천의 아침- 50년을 돌아온 사람의 길
50년을 돌아온 사람의 길계양구가 북구이던 1980년대 중반, 서울 갈 때는 삼화고속을 애용했다. 계양구 효성동 집에서 전철을 타러 부평까지 나가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역까지 시간이 걸렸고, 전철 안에선 앉기는커녕 수북이 올라온 콩나물시루 속 덜 자란 콩나물 신세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에 반해 삼화고속은 집에서 가까운 부평공단에서 탈 수 있는데다 소파처럼 편하게 앉아서 오갈 수 있었다. 어쩌다 예쁜 여자라도 옆자리에 앉으면 가슴이 뛰었고, 활주로처럼 쭉 뻗은 ‘경인고속도로’를 중후하게 질주하는 버스의 속도감도 괜찮았다. 서울에서 밤늦게 돌아올 때는 애를 먹기도 했다. 과음으로 차멀미를 하거나 화장실이 급해도 도착할 때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참아야 했던 것이다. 언제부터였던가. 경인고속도로가 점차 기능을 잃어가고 인천지하철, 인천공항철도 개통 등 교통 여건이 좋아지면서 삼화고속은 추억 속의 버스로만 남게 되었다. 1968년 12월 개통한 경인고속도로는 국방도로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1941년 일제는 조병창이 있던 부평과 인천항 간 군수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국방도로 건설을 추진한다. 3년 안에 완공할 계획이었으나 상당수의 남성이 징용되며 공사가 지체됐고, 광복을 맞으면서 도로 건설은 중단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효성동, 작전동 일대엔 공사 흔적인 아스팔트 길이 남아 있었는데 그 옆으로 몇 개의 송유관이 지나갔다. 어느 날 누군가 송유관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남자들은 똥지게에, 여인들은 항아리에 기름을 받아냈고 그렇게 보릿고개를 넘어갔다. 국방도로를 확장해 경인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전까지 도로변 송유관은 생계 수단 가운데 하
2020-02-03 202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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