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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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커스, 인천 - 한국지엠 사람들
TRAIL BLAZER : 개척자, 선구자한국 자동차의 개척지에서 새 길을 열다오늘도 당연하게 쓰이는, 무심코 손에 닿는 물건들. 그 누군가가 일터에 틀어박혀 인생을 내어주고 만들어낸 것들이다.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며 인천, 그리고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자랑스러운 ‘메이커스’를 만난다. 그 세 번째로 우리나라 자동차가 첫 시동을 건 부평에서, 오늘 네 바퀴로 새로운 길을 달리는 ‘한국지엠’을 찾았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한국지엠 부평공장 '트레이블레이저' 제작 현장에서. 직원 한재홍, 김진홍, 정진근, 권오관(왼쪽부터) 1986년, 아버지의 봄 ‘5년만 버티다, 내 가게를 내자.’ 길거리에서 쌀장사를 하고 연탄을 팔다 막다른 골목에 섰다. 돈이 필요했던 아버지에게 몸을 쓰는 것 말고 선택의 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한국지엠 신차 팀의 정진근(59) 직장은 1986년 봄, ‘대우자동차’에 들어갔다. 기름때를 묻히는 일이지만 그래도 운이 좋았다. 부평에 있는 자동차 공장에 다닌다고 하면 어디서든 어깨를 으쓱할 수 있었다. 그가 입사하고 두 달 후 그 시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르망’이 탄생했다. 9만7,000원. 1986년 4월, 그가 한 달을 꼬박 일하고 받은 첫 땀의 대가였다. 그 후로 그는 주말에도 일하고,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를 빼곤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1980년대는 2교대 근무로 근로자들이 오전 8시에 출근해서 오후 8시 반에 퇴근했다. 종일 일하고도 야간 조를 대신해 밤을 새우곤 했다. 내 몸 부리는 만큼 정직하게 돈을 벌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목표했던 5년이 지났다. 생각보다 손에 주어진 게 많지 않았다. 그 사이 아이가 둘이나 생겼다
2020-02-28 2020년 3월호 -
보조끼 데죠 1908-헝가리 의사가 본 제물포
봄, 전시 보조끼 데죠 1908헝가리 의사가 본 제물포“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수평선 너머로 볼 수 있었던 푸른 산으로 덮인 조선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의 승계 기간이나 내부 소요 사태 중에는 외국 군함이 조선에 입항하기 어려웠다.”대한민국과 헝가리는 1989년 정식으로 수교를 맺었으나 그 시작은 12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892년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외교 관계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몇 명의 헝가리 사람이 제물포항에 들어왔는데 군의관 보조끼 데죠Bozóky Dezsó도 그중 한 명이었다.보조끼는 1871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도시인 너지바러드Nagyvárad에서 태어났다. 1905년 오스만 제국을 여행하면서 처음 사진을 접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소속의 군의관으로 1907년 군함 ‘페렌츠 요제프 Ⅰ세’호를 타고 중국과 일본 등을 오갔다. ‘페렌츠 요제프 Ⅰ세’호는 대한제국에 입항하려 했으나 쉽게 들어올 수 없었고, 1년 6개월이 지난 1908년에서야 중국 취푸曲阜, Qufu에서 출항해 제물포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파른 언덕의 모서리에는 바람이 잘 통하는 일본 찻집과 정원이 있다. … 마치 요코하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잘 알려진 깔끔하고 높게 솟은 일본식 집들이 사방에 있다. … 제물포에는 한국 동네도 있으나 중국식 높은 가옥과 일본식 목조 주택이 점점 많이 들어서고 있다.”보조끼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그가 본 장면들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는 제물포를 보면서 일본의 요코하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보조끼가 본 인천은 일본식 집, 찻집에서 흘러나오는 일본 노래, 거리에서 들려오는 게이샤 성가
2020-02-28 2020년 3월호 -
인천의 아침 칼럼
백범白凡이 사랑한 인천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인 안두희. 그가 1996년 가을 ‘정의봉’에 맞아 숨졌을 때 그의 방에 튀어 있던 핏자국을 지금도 기억한다. 단죄를 받기 전까지 안두희는 인천시 중구의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백범 암살의 배후를 밝혀내겠다는 젊은 기자의 호기로 그의 집 장롱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몇 장의 사진을 발견한 게 전부였다.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 씨는 작은 체구에 동그란 눈, 굳게 다문 입술의 40대 초반 버스 운전기사였다. 평소 백범을 존경했던 그는 칼국수를 밀 때 쓰는 길이 40cm의 방망이에 ‘정의봉’이라는 글씨를 새긴 뒤 안 씨를 찾아가 “백범 암살 배후가 누구냐”고 추궁한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안두희의 정수리에 정의봉을 내리꽂는다. 청년 김창수(백범)가 수인 생활을 했던 신포동과 죽음의 노역을 해야 했던 인천항. 안두희가 백범의 발자취 선연한 중구에 숨어 살다 피살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백범이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고 일컬었을 만큼, 인천은 선생이 가장 힘겹고도 찬란한 시간을 보낸 곳이다. 백범은 인천에서 두 차례 옥고를 치렀고, 광복 이듬해 두 번 인천 땅을 밟았다. 1896년엔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며 일본 장교를 살해해서, 1914년엔 일제가 조작한 ‘안악사건’으로 인천감리서에서 수형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첫 투옥 땐 탈옥했으나 두 번째 갇혔을 땐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의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 지옥 같은 노역은 다른 수인들과 함께 쇠사슬에 묶인 채 지게에 흙을 퍼 담아 인천 앞바다를 매립하는 일이었다. 인천에 머물던 시기, 백범은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다. 인천으로 들어온 신학문과 신문물을 공부하면
2020-02-28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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