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아침 -부처님은 왜 처음 인천으로 오셨을까
부처님은 왜 처음 인천으로 오셨을까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전등사 대웅보전“김 기자, 보문사에 팔만대장경 인본 3질이 있었다는 내용 알고 있었소?” 2015년 인천대학교 문헌정보학과 A교수의 전화를 받는 순간 심장이 요동쳤다. 강화도가 팔만대장경 판각지였음을 뒷받침하는 새롭고도 구체적 증거가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초조대장경 조조肇造 1000주년이던 2011년 시작한 ‘팔만대장경’ 탐사 취재 욕기가 다시금 전신으로 쫙 퍼졌다. 인천대학교로 달려가 만난 A교수는 ‘보문사에 대장경 인본(인쇄한 책) 3질을 보관했다’는 중국 四庫全書 ‘고려국대장이안기’ 기록을 보여주며 “팔만대장경을 강화도를 중심으로 판각·보관했다는 명백한 사료”라고 말해줬다. 인본은 경판을 보관한 위치와 가까운 곳에 두는 것이 관례이다. 따라서 대장경판당이 있는 강화도 옆 석모도 보문사에 인본을 보관한 것은 합당한 일이었다. 2011년 한 해 동안 합천, 남해, 대구와 강화도를 종횡무진 돌고 돌았다.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1236~1251년 판각한 뒤 150년간 보관했던 사실을 재확인하는 가치 있는 여정이었다. 쌓으면 백두산보다 높고, 한문을 잘 아는 사람이 매일 읽어도 30년이 걸린다는 이 불가사의한 8만여 장의 경판이 1398년 합천으로 간 건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았지만 말이다. 방대한 동아시아 불교 지식과 최첨단 하이테크가 결합해 탄생한 팔만대장경뿐만이 아니었다. 금속활자의 세계 최초(1234) 발명지, 조선 시대 전국 4대 사고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정족사고’, 왕실 도서관인 ‘외규장각’ 등 강화도의 불교·인쇄 문화는 실로 대단했다. 인터넷 혁명에 앞서, 집단지성을 만들며
2020-05-03
2020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