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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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아침-8·15광복 75주년
8·15광복 75주년 인천, 태극기 휘날리며인천시가 지난해 광복절을 기념해 디자인한 태극기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장소’를 찾아낸 건 2013년이다. 대개의 특종이 그렇듯,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서울로 향했다. 제보자는 서울세관 공무원이었다. 그는 누렇게 빛바랜 고지도를 보여주며 ‘D39’란 필지 번호를 가리켰다. 번호 옆에 ‘稅務司公館’세무사공관이란 한자가 눈에 들어왔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장소는 ‘인천해관장 관사터’라고만 알려졌었다. 하지만 그 자리가 정확히 어딘지 기록을 못 찾아 화도진이다, 올림포스호텔이다 등 수십 년 동안 의견이 분분하던 터였다. 그런데 자유공원 입구인 ‘중구 북성동3가 8-3’(현 리움웨딩홀)이 조약 체결 장소란 사실이 고지도의 발견으로 밝혀진 것이다. 역사의 오류를 바로잡으며 진실에 방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특종 보도는 방송, 신문 등 여러 타 매체로 확산되었고 사학계의 중요 의제로도 설정됐다. 수년 뒤 전문가들의 논의와 면밀한 연구를 거친 끝에 ‘D39’ 자리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로 비정되었다. 후속 취재 보도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알게 된 ‘인천 태극기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던 1882년(고종 19) 5월 22일 전까지 우리나라엔 정식 국기國旗가 없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앞둔 1882년 5월 14일,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Schufeldt 제독은 조선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조선의 국기를 만들어 조인식에 사용해 달라”고 요청한다.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 제작을 명했고, 이응준은 슈펠트가 타고 온 미국 함정 스와타라Swatara호에 머물며 조약 체결 8일 전 제작을
2020-07-31 2020년 7월호 -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② 광성고등학교
나라를 부흥케 하고 사람을 이롭게 하라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두 번째 등굣길은 ‘인재육성 흥국부민人材育成 興國富民’의 건학 이념을 이어가며 인천을 움직이고 있는 ‘광성고등학교’다. 중구 도원동 꼭대기, 드넓은 서쪽 바다의 정기 품은 그 길을 인천시 홍보대사 김태희 씨(아트 사커, Art Soccer)가 따라 걸었다.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65년 한자리를 지킨 굳건한 거목비좁은 주택가를 지나 학교로 향한다. 다다른 교문. 허나 아직 멀었다. 가파른 비탈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가쁜 숨을 고르며 허리를 편다. 웅장한 교사校舍가 눈에 들어찬다. 학교가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인천 원도심의 너른 풍광이 펼쳐진다. 학교는 그렇게 65년 세월 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인천을 굽어봤다.“‘정기精氣’라는 말이 있잖아요? 광성고등학교는 그 말이 딱 어울리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아요. 도심이 개발되기 전에는 서해를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설립자 추포秋圃 류충렬 선생. 그는 광성을 논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아니 어쩌면 광성 그 자체다. 때는 6·25전쟁 직후, 먹고살기만도 벅찼던 그 시절. 당시 경찰서장이었던 류충렬 선생은 도원동 언덕에 희망의 밀알을 뿌렸다. 광성의 모태 인천소년수양원의 탄생이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로 연명하던 전쟁고아와 길바닥에 내앉은 아이들에게 배움의 길이 열렸다. 가슴에 새겨진 ‘인재육성 흥국부민人材育成 興國富民’의 가치를 몸소 실천한 순간이었다. “드넓은 서해를 바라보아라.
2020-07-02 2020년 7월호 -
인천 소사-1981.07.01 인천직할시로 승격
1981.07.01 인천직할시로 승격300만 인구를 자랑하는 살기 좋은 도시 인천. 지금의 인천광역시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얻기 전, 인천은 경기도에 속했다. 1981년 7월 1일, 직할시로 승격됐을 당시에도 면적 약 206km2로, 지금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지속적인 간척사업을 통해 몸집을 키웠으며, 1980~1990년대를 전후로 현재의 검단과 계양구 북부 등 주변 지역이 편입됐다. 1995년 지방자치제 시행 직전에는 정부의 직할시 광역화 정책에 따라 경기도 강화군과 옹진군까지 품에 안으며 오늘날 국내 최고의 광역시로 자리 잡았다.그때, 7월의 인천은…1879. 07. 01인천에 화도진花島鎭, 부평에 연희진延喜鎭 신설1939. 07. 01 인천관측소, 인천기상대로 개칭1959. 07. 01경인선, 제물포역 신설1982. 07. 13인천개항백주년기념탑 기공1986. 07. 30북인천우체국 개국1989. 07. 02월미도 문화의 거리 개장1993. 07. 05인천지하철 제1호선 기공식 거행2005. 07. 11인천항만공사 설립
2020-07-02 2020년 7월호 -
인천 지명-산 넘고 물 건너, 무네미
산 넘고 물 건너, 무네미관모산 기슭에 ‘수현水峴’이라는 작은 고개가 있다. 그대로 해석하면 ‘물고개’라는 뜻인데, 순우리말 이름인 ‘무너미고개’ 또는 이 말의 발음이 조금 바뀐 ‘무네미고개’를 한자로 바꾼 것이다. 무너미에 대해서는 흔히 조선 시대 운하 건설에 얽힌 전설을 들어 설명하곤 한다. 당시 이곳 무네미고개를 포함한 인천과 김포 세 곳에서 물길을 뚫어보려 했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그때 어떻게든 ‘물길을 넘겨’ 운하의 길을 터보려고 했다고 하여 ‘무(물)너미’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너미’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곳곳에 있다. ‘무너미’뿐 아니라 ‘무네미’ ‘무내미’ 또는 서울의 ‘수유리水踰里’처럼 이를 한자로 바꾼 이름도 있다. 그런데 이런 곳들에는 운하 건설과 같은 전설이 없다. 따라서 이 이름은 국어학적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우리말 ‘무너미’는 대개 두 가지 뜻을 갖는다. 하나는 ‘물넘이’의 발음이 바뀐 것이다. 이는 강이나 바닷가 등지에서 ‘물이 넘어오는 곳’이나 ‘물 너머에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또 하나는 ‘모넘이’의 발음이 바뀐 것이다. ‘모’는 ‘뫼’와 함께 산山을 말하는 우리 옛말인데, 그 발음이 ‘무’로 바뀌어 쓰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런 경우의 ‘무너미’는 ‘산을 넘어가는 곳’이나 ‘산 너머 동네’ 정도의 뜻이 된다.인천의 무너미는 이들 두 가지 모두로 해석이 된다. 첫째는 이곳 바로 앞에 장수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동네 근처에 관모산과 거마산 등의 작은 산들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2020-07-02 2020년 7월호 -
몽(夢)땅 인천 Ⅱ-‘백마’는 달리고 싶다
‘백마’는 달리고 싶다백마극장은 1950년대 탄생해 198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습니다.부평공단 근로자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백마극장에선언제나 코를 훌쩍이고 낄낄대는 소리와‘아이스께끼 사려’ ‘오징어 땅콩 있어요’ 외침이 앙상블을 이루었습니다.산곡동 재개발 계획에 따라 백마극장은 곧 헐리게 됩니다.백마극장의 멋진 영화映畵 같았던 옛 영화榮華가 그립습니다.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2020년 6월 부평구 산곡동 백마극장
2020-07-02 2020년 7월호 -
인천의 아침
계양산과 민선 7기 2주년글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산을 오르는 길은 철마다 새로웠다. 진달래가 피어나는가 싶으면 연초록 이파리들이 부풀어 올랐고, 황갈색 낙엽으로 바스락거리다 앙상한 가지 위로 눈이 쌓였다. 정상에서 먹는 김밥이나 산을 내려와 등산로 초입 해장국집에서 막걸리를 곁들인 아침 식사는 주말 최고의 ‘소확행’이었다. 동행한 친구나 선·후배와 죽이 맞으면 낮술로 이어지기도 했다. 군 생활을 한 곳도 계양산 자락에 위치한 부대였다. 점박이젤리처럼 생긴 도롱뇽 알을 찍으려다 새로 산 휴대폰을 계곡물에 빠뜨렸던 순간, 롯데골프장 건설을 반대하며 나무 꼭대기에 천막을 설치한 채 아찔한 고공 시위를 벌이던 시민단체 사람들의 모습도 계양산의 기억이다. 해발 395m. 계양산 정상에 서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인천은 물론이고 서울·김포·부천·강화와 경기만 일대를 360도 파노라마로 볼 수 있다. 삼국시대 사람들이 왜 이 자리를 차지하려 치열한 전투를 치렀는지, 어째서 중턱을 빙 둘러 1,184m의 성을 쌓았는지 짐작이 간다. 계양산은 한반도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한가운데이면서 한강 하구와 경기만 육상·해상 교통의 교차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강 서부 지역 해안 방어의 전략 거점이다 보니 개항기 땐 중심성衆心城을 쌓기도 했다. 문화재적 가치도 가치이지만, 지난 5월 ‘계양산성 국가사적 지정’은 무엇보다 인천시와 계양구가 꾸준히 공들여온 치열한 노력의 결과이다. 문화재 지정을 비롯해 ‘민선 7기 인천시정부’는 출범 이후 ‘해묵은 난제’를 하나씩 해결하며 황소처럼 뚜벅뚜벅 걸어왔다. ‘인천愛뜰’ 조성은 민선 7기 철학의 단면이다. 견고한
2020-07-02 202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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