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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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에 비친 인천 ⑥ 교동도
평화의 섬, 그리움은 희망으로‘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고제민 화백이 그린, 평화의 섬 교동도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 교동 은행나무 33×23.5(cm) 한지 위에 펜 2020교동 무학리에 있는 천 살 먹은 할머니 나무. 바다 건너 마주 보는 이북 땅에는 할아버지 나무가 산다고,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남과 북, 천년 나무나무는 천년의 시간을 살았다. 교동 무학리 542번지, 마을 어귀에 뿌리내린 아름드리 은행나무. 해마다 가을이면 노란빛 열매가 휘청휘청 매달린다. 북에서 남으로 꽃가루가 바람에 실려와 결실을 이룬다고, 동네 사람들은 믿는다.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전해 내려온 이야기다. 단 2.5km의 바다를 사이에 둔 아픈 역사의 간극. 교동도와 황해도 연백은 가까운 이웃이었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그날 이후, 한반도가 두 동강 나면서 닿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잠시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흘러 강산이 일곱 번 변했다. 마을에 사는 황순숙(74) 할머니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잠시 다녀오마, 하고 바다 건너 윗동네에 갔던 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살아생전 아버지를 뵐 줄 알았는데, 이제 글렀어. 내 나이 벌써 일흔넷, 아버지가 살아계셔도 아흔네 살이니….” 죽기 전에 한 번쯤 아버지를 볼 수 있을까, 그러기에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이젠 너무 늙어버렸다.
2021-06-01 2021년 6월호 -
호국보훈의 달-현충탑
나라를 위해 청춘을 바친님을 기립니다유격 대원으로서, 첩보 대원으로서 자유 수호를 위해 온몸으로 적과 맞서 싸운 푸른 청춘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평화롭게 이 땅을 딛고 살아가고 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를 위해 장렬히 산화한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현충탑과 위령탑을 살펴본다.글 김윤경 본지 편집위원│사진 오인영 사진작가인천광역시 현충탑최근 야간 경관 명소로 각광받고 있는 수봉공원에는 인천광역시 현충탑이 있다. 현충탑은 인천 출신으로 6·25전쟁에 참가해 숭고한 목숨을 바친 영령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72년 공원 정상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나라를 지킨 영령들을 여기 모신다. 몸은 쓰러져도 넋은 나라를 놓지 않고 뜻은 겨레와 얽매이어 장하고 매운 정신 황해 마르도록 시민의 가슴에 흐르리라’라고 새겨져 있다. 미추홀구 도화동 산50-1재일 학도 의용군 참전비6·25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거주하던 유학생과 재일 동포 자녀 642명이 재일학도의용군을 조직했다. 의용군은 미국과 국군 부대에 수십 명 단위로 흩어져 인천상륙작전, 평양 입성, 압록강 해산진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에 참전했다. 그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1979년 수봉공원에 재일 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가 건립됐다.미추홀구 주안2동 산29-1강화군 현충탑섬은 적의 침공을 제일선에서 막아내는 바람막이다. 6·25전쟁 때 38선과 맞닿아 있던 우리 지역의 섬들은 온몸으로 적의 침입을 막아냈다. 그런 이유로 강화도에는 호국 영령들의 혼이 잠들어 있는 현충 관련 기념비가 많다. 강화군 관청리에는 6·25전쟁 당시 산화한 강화 출신 전몰 군경 1,013명(국군 735명, 특공대 18명, 경찰관 36명, 유격군
2021-06-01 2021년 6월호 -
문화 줌인-사진기자 박근원의 사진첩
찰나의 인천철로 위에 널빤지를 올려놓고 널뛰기를 하는 소녀들, 깨진 블록과 화염에 휩싸인 자동차. 인천시립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에선 지금 1960~1970년대의 향기가 솔솔 풍겨 나온다. ‘찰나의 인천’ 사진전이 열리는 중이다. 전시 작품은 사진기자 출신 원로 사진가 박근원(82) 씨가 기증한 흑백사진들로 꾸며졌다. 평범한 이웃의 일상, 사건, 풍경 등 전시는 3부로 기획됐다. 전시는 오는 6월 20일까지며, 7월 중순부터 인천시청역 열린박물관에서 2차 전시를 진행한다. ‘사진 속 인천, 그때 그 시절’로 들어가 본다.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사진 제공 박근원# 철로 위의 소녀들(1978)가난했던 시절, 기찻길은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였다. 소녀들은 널뛰기나 고무줄놀이를 했고 사내아이들은 못이나 병뚜껑을 철로 위에 얹어놓은 채 열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천천히 지나가는 화물차 칸에 올라타는 간 큰 아이들도 있었다. 수인선 용현역(현 인하대역) 근처. 세 명의 소녀가 철로 위에 널빤지를 얹고 널뛰기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위태롭다기보다 정겨워 보인다.# 인천공설운동장(1978)인천공설운동장은 축구, 야구, 육상 등 빅 이벤트가 펼쳐지던 인천의 랜드마크였다. 1934년 지금의 자리에 들어섰는데 영어의 ‘그라운드Ground’와 우리말 ‘운동장’을 조합해 ‘그라운동장’이란 별칭을 갖고 있었다. 나중에 인천숭의종합운동장이라 이름을 바꿨다가 2012년 지금의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들어섰다. 전국체육대회가 열린 어느 날, 한 갓을 쓴 ‘양반’이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초등학교 운동회(1977)1970년대 운동회는 소풍과 더불어 아이들의 2대 축제였다. 운동회가 열리는 날은 김밥과 삶은 달걀,
2021-06-01 2021년 6월호 -
인천 문화재 이야기⑥ 부평도호부관아(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호)
부평에서 구로까지 다스린 옛 영화의 흔적 남아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남동구 ‘간석오거리’를 경계로 택시요금이 달랐던 때가 있었다. 인천에서 부평 방면으로 넘어갈 경우 2,000원 정도 가산금이 붙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외지 사람들은 “같은 인천인데 왜 요금이 다르냐”며 택시기사와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부평과 인천은 다른 지역이었다. 지리적으로도 한남정맥(안성 칠장산에서 시작해 김포 문수산을 잇는 산줄기)이란 산줄기를 경계로 나뉘어 있었다. 산줄기 남쪽으론 인천도호부관아(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호)가, 북동쪽으로는 부평도호부관아가 각각 들어섰다. 조선 시대 인천도호부관아는 문학산 아래 일대와 제물포 지역을 관할한 반면, 부평도호부관아는 15개면에 이르는 광활한 행정구역을 다스렸다. 지금의 부평·계양·서구는 물론이고 부천, 서울 구로구의 온수·오류동 일대, 강서구 개화동과 김포공항 일대, 광명시 천왕역 주변까지가 부평도호부 관할 지역이었다. 청사의 규모도 상당했다. 축구장 4배 크기의 땅에 27개 동 232칸의 건물들이 있었다고 는 전한다.부평도호부관아를 지은 시기는 고려 성종 14년(995)이다. 이후 900년 동안 부평 일대를 통치했으나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건물이 헐리고 만다. 관아가 헐린 자리에 부평초등학교 전신인 부평공립보통학교 건물이 들어선다. 불행 중 다행으로 1개 동이 남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채 보존되고 있다. 이 건물은 수령이 정무를 집행하던 ‘동헌’이나 기거하던 ‘내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여섯 칸, 측면 두 칸 크기의 ‘ㅡ자형’ 건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부평도
2021-06-01 2021년 6월호 -
소소한 인천사-인천 지명
호랑이의 입을 닮은 ‘호구포’남동구 논현동 서남쪽에 있는 호구포虎口浦는 이름 그대로 ‘호랑이의 입처럼 생긴 포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지금은 많이 쓰이지 않지만 ‘범 아가리’가 바로 호구포의 순우리말이다. 예전에 호구포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포구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소래 오봉산 기슭에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으르렁거리는 모양의 검고 큰 바위가 있어 호구암이라 불렀고, 이 때문에 호구포라는 이름도 생겼다고 한다. 호구암은 바다 건너 대부도를 향해 있어 대부도에서는 개를 키우면 바로 죽어버렸다는데, 실제 그 지형으로 보아서는 타당성이 없고 그저 누군가가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다. 엇비슷한 다른 전설도 있다. 호구암 맞은편 경기도 안산의 산기슭에 옛날 어떤 세도가들 집안의 산소가 여럿 있었는데, 그들 집안의 자손들은 제대로 대를 잇지 못했다고 한다. 집안사람들은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하고 답답해 하기만 했는데, 한 풍수쟁이가 산소 건너편 호구암이 입을 크게 벌리고 산소를 삼키려는 모양이라 그렇다고 말했다. 이에 그 집안사람들이 호구암의 입 부분을 도끼로 찍어 없앴더니 그 뒤로 자손이 번성했다는 이야기인데, 지금은 호구암이라는 바위가 진짜 있었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결국 이는 모두 전설일 뿐일 테고, 실제로는 이곳의 지형이 바다 쪽에서 안으로 파고 들어와 호랑이의 입처럼 생긴 데에서 동네 이름이 유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이 매립되기 전인 1918년 일제가 발행한 지도를 보면 호구포 일대의 모양이 실제 호랑이의 입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1920년대에 버려진 개펄을 이용해 남동염전이 만들어지면서 호구
2021-06-01 2021년 6월호 -
인천의 아침-칼럼
조미전쟁 150주년, 수자기 펄럭이다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조미전쟁이 벌어졌던 광성보. 가운데 帥자가 써 있는 깃발이 수자기다.사진은 2010년 10월 재현한 광성보 전투 장면강화도 ‘광성보’에 가면 장엄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는다. 어재연(1823~1871) 장군의 풍모가 느껴지는 정문 안해루,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군인들의 무덤인 신미순의총, 치열한 백병전이 펼쳐졌던 손돌목돈대. 그곳에 서서 바다를 보노라면 150년 전 ‘조미전쟁’(신미양요)의 처절한 전투 장면이 염하처럼 빠르게 흘러간다.1871년 6월 11일 미군 함대는 광성보를 향해 무차별 함포 사격을 가한다. 광성보엔 당시 진무중군 어재연 장군과 수비병 600여 명이 배수진을 치고 있었다. 제대로 된 현대식 총 한 자루 없는 상황에서 어재연 장군은 동생 어재순, 조선군과 함께 목숨을 내놓고 전투에 임한다. 결과는 참혹했다. 미국이 전사자 3명, 부상자가 10명인 반면 조선군 전사자는 350명, 부상자는 20명에 달했다. 광성보를 점거한 미군은 이때 조선군이 하늘 높이 들고 싸우던 어재연 장군기인 수자기帥字旗를 강탈한다. 조미전쟁은 미국이 조선을 개항시킬 목적으로 침략했으나, 조선군의 격렬한 저항에 밀려난 사건이다. 조선으로선 ‘졌지만 승리한 전쟁’으로 평가된다. 당시 미국은 일본 등을 상대로 ‘포함외교’를 벌여 성공했지만 유일하게 조선에서만 실패하고 철수해야 했던 것이다. 참전자 슬라이Schley 해군 소령은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장렬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 죽었다.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는 기록을 남
2021-06-01 2021년 6월호 -
포토 에세이-광성보
지금으로부터 꼭 150년 전,광성보의 카키색 바다는 핏빛으로 소용돌이쳤습니다.1871년 6월 11일 최신예 함포를 앞세운 미국 함대는 광성보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습니다.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변변한 현대식 총 한 자루 없었지만격렬하게 맞서 싸웠고 수백 명이 장렬한 최후를 맞았습니다.강제 개항에 실패하고 돌아가던 미군이 용맹함을 높이 평가할 정도로 조선군의 전투력은 필사적인 것이었습니다.한 세기 하고도 반이 흘러 광성보는 지금, 시민들이 즐겨 찾는 문화유적 공원으로 피어났습니다.조국을 지키기 위해 장렬하게 싸우다 스러져간 조선군의 넋일까요?광성보에 피어난 무수한 들꽃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하늘거립니다.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2021-06-01 202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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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업데이트 2024-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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