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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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독립 40년, 오래된 미래 새로운 역사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인천 독립 40년’을 맞아 시민 공간으로 피어난 ‘인천시민愛집’과 ‘이음1977’, 그 가까이에서 130여 년 인천 바다를 지켜본 플라타너스를 김재열 화백이 그렸다.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 송학동 옛 시장 관사 42x30(cm) 2021 시민 가슴愛 지은 ‘인천시민愛집’. ‘인천 독립 40년’을 맞아 시민에게 품을 연다.역사의 시간,공간의 기억 ‘뚜드럭뚜드럭’ 망치질 소리가 고요한 응봉산 기슭을 두드린다. 송학동 옛 시장 관사를 새 단장하는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손길 닿을수록 먼지 자욱이 쌓여가던 옛집이 제빛을 찾고 윤기를 더해간다. ‘인천 독립 40년’. 1981년 7월 1일, 인천이 경기도에서 벗어나 직할시로 승격했다. 2021년 7월 1일은 인천이 당당히 홀로 선 지 딱 40년 되는 날이다. 그 시간을 기리며 송학동 옛 시장 관사가 시민이 지은 이름 ‘인천시민愛집’으로 태어나, 시민 품에 안긴다. 1930년대 코노 다케노스케 별장 시절 모습 (사진제공 인천발전연구원)시민이 지은 이름 ‘인천시민愛집’으로 단장한, 송학동 옛 시장 관사1883년 1월 1일, 낯선 배가 인천 바닷가에 닿았다. 바다 건너온 파란 눈의 사람들이 응봉산 중턱 송학동에 터를 잡았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동네였다. 1888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 공원인 각국各國공원이 들어서고, 1901년 외국인들의 사
2021-06-30 2021년 7월호 -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⑭ 국립인천해사고등학교
가자, 세계의 바다로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열네 번째 등굣길은 바닷길이다. 인천항 굽어보며 세계로의 원대한 항해를 준비하는 해양 인재의 산실, 국립인천해사고등학교. 대한민국의 내일과 맞닿은 그 길을 3학년 김양환, 유지민 학생과 함께 걸었다.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인천의 역사와 닮은, 인천의 미래를 담은 학교국립인천해사고등학교(이하 인천해사고)는 인천과 닮았다. 1981년, 인천은 직할시로 승격되며 성장과 발전의 전기를 다졌다. 인천해사고의 역사도 올해로 꼭 40년이다. 시작은 인천선원학교였다. 1년제, 100명의 학생들이 더 큰 바다를 향해 닻을 올렸다. 인천항의 관문인 갑문 가까이 자리한 학교는 그렇게 40년 세월 동안 대한민국 해양 인재를 세계의 바다로 진출시켰다.“부산과 인천, 전국에 딱 두 곳 있는 해사고등학교라 학생들의 자부심이 커요. 국제적인 항해사와 기관사를 양성하는 해양수산부 소속 학교이기 때문에 인천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죠.”인천해사고가 오늘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93년이다. 덩치를 키워 선박운항과와 항해과, 동력기계과 등 총 18개 학급, 900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같은 꿈을 키웠다. 인천이 직할시와 광역시로 업그레이드되며 경쟁력을 쌓았던 것처럼, 인천해사고도 2012년 교육과학기술부(현 교육부) 해양 분야 마이스터고등학교 지정으로 새로운 성장 발판을 마련했다. “마이스터고는 한 마디로 ‘장인’을 길러내는 곳이에요. 해양, 항공, 조선, 자동차 등 전통적인 산
2021-06-29 2021년 7월호 -
인천 문화재 이야기⑦ 자유공원 플라타너스(인천시 등록문화재)
개항 때부터 130여 년간 자유공원 지켜온 아름드리나무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인천 중구청 뒤 남부교육청 앞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샛길이 하나 나온다.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지름길이다. 이 길에 들어서면 어른 두세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끌어안을 수 있는 아름드리 거목이 나타난다. 높이 30.5m, 가슴 높이 둘레 4.7m의 이 나무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플라타너스다. 식재 연도 1884년. 표지석은 이 나무가 뿌린내린 해를 개항 이듬해로 표기하고 있다. 1883년 개항과 함께 인천으로 신식 교육, 의학, 종교, 피아노 등 서양 문물이 들어왔다. 많은 외국인이 더불어 제물포 땅을 밟는다. 인천항으로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마주치는 응봉산은 외국인들에게 매력적인 땅이었다. 응봉산 자락에 집을 지으면 아름다운 제물포 앞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하고 파티도 열 수 있을 것이었다. 높이 69m의 아담한 응봉산에 외국인들이 하나둘 터를 잡기 시작했다. 제각기 좋은 자리를 차지한 외국인들은 이제 집주변에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을 만들 계획을 세운다. 각국공원은 그렇게 탄생했다.북미가 고향인 플라타너스는 이 시기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2015년 6월 29일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수령을 감정한 강진택 국립산림과학원 박사는 “1883년 개항 직후 미국이나 영국에서 가져온 국내 최초의 플라타너스로 추정된다”며 “외형이 수려한 데다 인천상륙작전 때도 원형을 유지한 채 살아남아 근현대사를 담은 나무라는 점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자유공원 플라타너스는 현재 인천시 등록문화재로 예고됐으며, ‘천연기념물’ 지정을 추진 중이다. 각국공원이란 이름
2021-06-29 2021년 7월호 -
소소한 인천사-인천 지명인천 지명
미추홀과 인주 그리고 ‘인천’인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초기 태종 13년(1413)이다. 삼국시대 초기 인천의 이름은 ‘미추홀’이었다. 에는 “매소홀현을 일명 미추홀이라 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매소홀은 고구려 시대의 인천 이름이다. 에도 “인주仁州는 원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이며, 일명 미추홀이라 한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미추홀의 ‘미’나 매소홀의 ‘매’는 물(水)의 뜻이며 ‘홀’은 성城이나 골로 해석되고 ‘추’나 ‘소’는 모두 사잇소리 ‘ㅅ’으로 풀이하고 있다. 고구려 시대에 매소홀이라 불리던 인천은 후기 신라의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소성현’으로 바뀌었다. 경덕왕이 신라의 제도나 관직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한편, 토박이 말로 되어 있는 땅 이름을 모두 그 뜻에 해당하는 한자어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고려 숙종(1095~1105)에 이르러 소성현은 ‘경원군’으로 개칭, 승격됐는데, 이는 인천이 숙종의 어머니 인예仁睿순덕태후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인종(1122~1146) 때에는 인종의 어머니 순덕왕후의 고향이 됨으로써 ‘인주仁州’로 개칭됐다. 고려 말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인천은 경원부로 개칭, 승격됐는데, 이는 인천이 ‘7대 어향’이었기 때문이다. 7대 어향이란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인천이 왕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고향에 해당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조선 초기 태조 원년(1392)에 인주로 환원되고 태종 13년에 이르러 모든 군이나 현을 ‘주州’로 바꾸는 바람에 인주가 물에 가깝다 하여 ‘인천’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천의 명칭은 한자 풀이식의 ‘어진 내(仁川)’가 아닌, ‘인주 이 씨’에서 유래됐음을
2021-06-29 202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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