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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빈곤의 삶 소복이 덮던, 하얀 밀가루

2020-01-03 2020년 1월호


메이커스, 인천   대한제분


빈곤의 삶 소복이 덮던,

하얀 밀가루

 
오늘도 당연하게 쓰이는, 무심코 손에 닿는 물건들. 그 누군가가 일터에 틀어박혀 인생을 내어주고 만들어낸 것들이다.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며 인천, 그리고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자랑스러운 ‘메이커스’를 만난다. 그 첫 번째로 배고픈 시절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고, 오늘 우리 식탁을 풍요롭게 하는 대한제분을 찾았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밀가루와 그 재료가 되는 원맥. 대한제분 인천 공장에서.
스타일링 진희원
 
  
1960년대 대한제분 밀가루.
곰표에 고래표, 암소표까지….
그래서 공장 사람들은 대한제분을 ‘동물농장’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1960년대 제분 공장 인부들이 양곡을 하역하는 모습.

 
 
살기 위해, 노동자의 삶 속으로
 
1960년대 인천항 부두 하역장, 너저분한 바닥에 원맥이 버려져 널려 있다. 제분 공장 인부들이 그 알알을 움켜쥐고 주머니며 장화 속에 숨겨 넣느라 여념이 없다. 가족의 주린 배를 채우고 내다 팔아 궁핍한 살림에 보탤 수도 있으리라. 그 간절한 마음들이 부둣가 창고의 곡물 언덕처럼 쌓이고 쌓여 산더미가 되어갔다.
1920년대 동구 만석동과 화수동 일대 갯벌을 메운 자리에 거대한 공장들이 들어섰다. 일본에 본사를 둔 회사들이 터를 잡았다. 6·25 전쟁을 피해 북에서 온 사람들, 인생 막다른 골목에 선 사람들이 만석동 ‘똥마당’으로 떠밀려왔다. 밤낮으로 꺼지지 않는 공장지대의 불빛은 고단한 삶을 지탱하게 하는 한 줄기 희망이었다. 그렇게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은 공장 노동자의 삶 속으로 주저 없이 걸어 들어갔다.
1921년 일본제분은 만석동 매립지에 근대식 제분 공장을 설립했다. 그 후 광복을 맞고 6·25 전쟁을 지나, 1952년 창립자 이한원은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공장을 나라로부터 사들여 ‘대한제분’으로 다시 세웠다. 그해 밀가루 연간 생산량은 22kg 한 포 기준으로 100만 포대에 이르렀다. 어려운 시절, 시커먼 공장에서 쏟아내는 하얀 밀가루는 빈곤한 삶을 위로하며 내일을 살아갈 힘을 주었다. 1957년에는 제분 공장 신관을 새로 지었다. 제분업계 단일 규모로는 동양 최대 시설이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한 축을 담당했다.
 
 
기계는 대신할 수 없는 것
 
당장 먹고사는 일이 급급하던 시절이었다. 공장에서 매달 직원들에게 22kg 밀가루 한 포씩을 안겨주면 마음까지 두둑이 차올랐다. 대한제분은 창립기념일인 크리스마스와 명절 때도 밀가루로 선심을 썼다. 직원들은 밀가루를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져가기도, 술과 밥으로 바꿔 먹기도, 전표를 사는 사람에게 팔기도 하며 유용하게 썼다. 공장이 24시간 돌아가니 몸 쓰는 만큼 급여도 받고, 가욋돈까지 챙길 수 있으니 더 바랄 게 있으랴. 아버지는 노동으로 육체가 지쳐가는지도, 늙고 쇠해가는지도 모르고 일했다.
설립 초기 대한제분 인천 공장의 직원 수는 무려 1,000여 명에 달했다. 현재는 160여 명이 일하고 있다. 그 옛날 한겨울에도 땀 흘리며 원맥 가마니를 나르던 하역 노동자들은 모두 사라졌다. 오늘, 멀리 미국과 호주, 캐나다에서 온 2만~3만t 급 선박이 원맥을 쏟아내면, 그 원맥은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거대한 저장탑 ‘대한 싸이로’로 일사불란하게 집산된다. 제분 공정 대부분도 무인 자동화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모든 과정을 관리하고 검사하는 건 온전히 사람의 몫이다. 기계는 결코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대한제분 인천 공장 내부.
무인 자동화 시스템으로 움직이지만,
모든 공정 끝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


 
원맥 선박이 닻을 내리는 인천 내항.
오른쪽으로 저장탑과 이어진 컨베이어 벨트가,
왼쪽으로는 월미바다열차의 레일이 이어져 있다.

 
 
 
땀 흘리는 만큼, 아름다운 삶
 

김수철(49) 기장은 1995년 대한제분에 다니던 외삼촌의 소개로 이 공장으로 왔다. 그때만 해도 공정마다 온기 어린 사람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사람이 일일이 밀가루를 포대에 담아 재봉까지 해서 내보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무슨 공사를 하고 또 무슨 공사하더니 자동 설비와 로봇들이 점점 늘어났지요.” 현재 대한제분 노동자의 평균 연령대는 40, 50대로 가장 젊은 사람이 30대 후반이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는 다시 채워지지 않았다.
“요즘은 60도 젊은 나이인데 떠나는 선배들을 보면 안타까워요. 모두 인재인데…. 사수들 중엔 일용직으로 아직 출근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청소부터 시작해 모진 말 들으며 힘들게 일을 배웠지만, 때론 사람들에 부대끼던 그 시절이 그립다.
 
가난한 시절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 대한제분은, 오늘 여전히 우리 식탁을 풍요롭게 한다. “와, 아빠 ‘회사’다.” 장성한 김 기장의 두 딸은 어린 시절 ‘곰표’가 그려진 밀가루만 보면 이렇게 외치곤 했다. “우리나라에 어디 ‘대한제분’ 모르는 사람 있나요?” 그의 말에서 자식들 잘 키우고 평생 먹고살게 한 직장에 대한 고마움과 자부심이 묻어난다. 곰표 하면 밀가루, 밀가루 하면 대한제분, 그리고 인천…. 북성포구 가는 길, 곰표가 새겨진 거대한 공장을 볼 때마다 이렇게 생각의 고리가 이어지곤 했다. 70년 가까이 한길을 걸어온 대한제분은 부산 공장과 대한싸이로, 대한사료, DH 바이탈피드 등의 자회사를 거느린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최근에는 중장년층에게 친숙한 ‘곰표’가 뉴트로(New-tro) 열풍 속에 젊은이들 사이 핫한 브랜드로 떠오르기도 했다. 시대가 변해도 긴 시간 묵묵히 흘려온 땀의 생명력은 길다.
 
일하는 게 전부인 삶, 살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녹록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인천항 거친 바닷가 밀가루 공장 사람들은, 오늘도 누군가의 허기진 가슴을 채우며, 땀 흘려 움직이는 만큼 아름다운 삶을 살아내고 있다.
 
 
 
‘맛있는 곰표’를 넘어 ‘즐거운 곰표’로.
뉴트로 열풍을 타고 곰표가 젊은층에게
핫한 브랜드로 떠올랐다.
 

참고 : 대한제분 www.dhflour.co.kr, 국립민속박물관 <인천공단과 노동자들의 생활문화>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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