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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의 아침 칼럼

2020-02-28 2020년 3월호

백범白凡이 사랑한 인천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인 안두희. 그가 1996년 가을 정의봉에 맞아 숨졌을 때 그의 방에 튀어 있던 핏자국을 지금도 기억한다. 단죄를 받기 전까지 안두희는 인천시 중구의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백범 암살의 배후를 밝혀내겠다는 젊은 기자의 호기로 그의 집 장롱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몇 장의 사진을 발견한 게 전부였다.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 씨는 작은 체구에 동그란 눈, 굳게 다문 입술의 40대 초반 버스 운전기사였다. 평소 백범을 존경했던 그는 칼국수를 밀 때 쓰는 길이 40cm의 방망이에 정의봉이라는 글씨를 새긴 뒤 안 씨를 찾아가 백범 암살 배후가 누구냐고 추궁한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안두희의 정수리에 정의봉을 내리꽂는다. 청년 김창수(백범)가 수인 생활을 했던 신포동과 죽음의 노역을 해야 했던 인천항. 안두희가 백범의 발자취 선연한 중구에 숨어 살다 피살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백범이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고 일컬었을 만큼, 인천은 선생이 가장 힘겹고도 찬란한 시간을 보낸 곳이다. 백범은 인천에서 두 차례 옥고를 치렀고, 광복 이듬해 두 번 인천 땅을 밟았다. 1896년엔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며 일본 장교를 살해해서, 1914년엔 일제가 조작한 안악사건으로 인천감리서에서 수형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첫 투옥 땐 탈옥했으나 두 번째 갇혔을 땐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의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 지옥 같은 노역은 다른 수인들과 함께 쇠사슬에 묶인 채 지게에 흙을 퍼 담아 인천 앞바다를 매립하는 일이었다.

인천에 머물던 시기, 백범은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다. 인천으로 들어온 신학문과 신문물을 공부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민족운동가로 성장한 것이다. 아들이 투옥된 뒤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인천으로 온다. 자식 입에 밥 세 끼를 넣어주기 위해 곽 여사는 감리서 인근 객줏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헌신적 옥바라지를 한다. 인천대공원 백범 김구 동상 곁에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 함께 서 있는 이유이다. 찬밥을 바가지에 담아 선생이 갇힌 인천감리서로 향하는 형상의 곽 여사 동상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인천축항은 내 피땀이 배어 있는 곳이다.’(<백범일지> ) 백범은 1946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인천을 찾는다. 첫 방문 때엔 인천감리서와 인천축항을 돌아본 뒤 내리교회에서 강연을 했다. 인천 내리교회 1층엔 당시 사진이 걸려 있다. 그해 가을엔 강화도로 향한다. 자신의 석방을 위해 전 재산을 희사한 강화도 김주경 선생을 비롯해 탈옥 당시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인천시가 스카이타워아파트~유항렬 주택~월아천으로 이어지는 김구 순례길에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백범 기리기에 팔을 걷어붙인 것은 이처럼 인천과 백범의 끊을 수 없는 인연 때문이다. 시는 백범이 사랑한 인천, 인천이 사랑한 백범이란 취지의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아직은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 중순, 감리서가 있던 스카이타워아파트 언덕에 서서 겨울바람을 맞는다. 선생이 오르내렸던 가파른 경사 길을 따라 인천항 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철거덕철거덕, 어디선가 차가운 쇠사슬의 환청이 들려온다. 유항렬 주택을 지나 옛 객줏집에 이르자 하늘에서 눈발이 흩날린다. 저 눈송이는 혹시 감옥에 갇힌 외아들을 바라보며 흘린 곽낙원 여사의 눈물이 아닐까.

·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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