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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의 아침

2020-03-31 2020년 4월호


4·19 60주년, 민주화·노동 운동의 메카 인천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머리에도 눈썹에도 두툼하게 톱밥 가루가 쌓였다. 마스크를 두 장씩 썼음에도 코를 풀면 시커먼 이물질이 끝도 없이 나왔다. 반원 모양으로 돌아가는 쇠 톱날에 손가락을 잘릴 뻔한 일도 있었다. 인천시 서구 가좌동 A목재 공장의 작업 환경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노란 월급 봉투엔 만원짜리 몇 장과 천원짜리, 그리고 동전이 뒤섞여 있었다. 일이 끝나면 반장이 삼겹살에 소주를 사주는 게 그나마 하루의 유일한 낙이었다. 반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반장은 월급의 대부분을 밥 사는 데 쓰는 것 같았다.

친구의 제안으로 공장에 다닌 시기는 ‘5·3항쟁’이 터진 직후인 1986년 여름이었다. 당시 ‘운동권’이던 친구는 <어느 돌멩이의 외침>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과 같은 책을 슬쩍슬쩍 전해주더니, “방학인데 놀면 뭐 하냐, 용돈이나 벌자”며 공장으로 데려갔다. 명분은 용돈 벌이였으나, 그의 목적은 순진한 친구의 ‘의식화’였다. 소심한 탓에 운동권에 합류하진 못했지만 대학 시절 내내 ‘무임승차 열병’을 앓아야 했다.

1970~1980년대 많은 운동가와 학생들이 인천에 산재한 공장에 들어간다. 노동자들을 의식화하기 위한 위장 취업이었다. 이들은 노동 현장에서 “자본가, 군사독재 정부에 맞서 싸워 권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의식화 교육을 진행한다. 멀쩡한 학생들이 ‘빵잽이’(수감자)가 됐고, 간첩으로 둔갑해 신문에 나왔지만 투쟁은 계속됐다. 고 김근태 의원, 하종강 교수 등 노동운동가들의 거점이던 ‘인천기독교 도시산업선교회’와 같은 지하운동 조직들이 큰 축을 담당했다. 그렇게 1970년대 동일방직 노동자 투쟁, 1987년 6·10항쟁의 불을 지핀 1986년 5·3항쟁,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등 수많은 노동자, 운동가, 학생들이 중심이 된 크고 작은 혁명이 일어난다.

이 시기 민중예술도 만개했다. 김민기는 1977년 군 제대 뒤 부평 봉제 공장에서 일하면서 동료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상록수’를 만들었다. ‘솔아 푸르른 솔아’는 시인 박영근이 인천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지은 시를 바탕으로 안치환이 작곡한 음악이다. 영화 ‘파업전야’(제작 장산곶매)는 1980년대 부평공단에서 파업 중인 한 금속회사의 노사 간 대결을 그린 영화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학 시절 학교에서 ‘파업전야’를 보며 분노와 두려움으로 가슴 졸였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당시는 백골단이라는 무술경찰들이 학교 안으로 뛰어들어와 마구잡이로 학생들을 끌고 가던 시절이었다.

앞서 1960년 봄, 인천에선 4·19혁명이 전개됐다. 제3대 대통령 선거 전날인 1960년 3월 14일 오후 10시 30분쯤 동산·인천·송도고 학생 30여 명이 성산교회 앞에서 가장 먼저 시위를 시작했다. 4월 19일 당일엔 부정선거를 자행하는 이승만 정권에 반기를 든 인천공고 학생들이 오전 수업 도중 거리로 뛰쳐나왔다. 인하공대 학생들 100여 명은 4월 21일 학교를 출발, 경동파출소 로터리에서 자유당 정권을 규탄했다. 인천의 4·19는 5·3항쟁, 6·10월 항쟁으로 이어지며 우리나라 민주화를 견인한다. 4·19혁명 60주년을 맞은 황해가 도도하게 출렁인다. 국가적 위기나 재난이 닥칠 때마다 혼연일체로 헌신, 마침내 극복해 낸 선인들의 모습이 물비늘로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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