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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의 아침-인천상륙작전과 월미도

2020-06-02 2020년 6월호

인천상륙작전과
월미도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A변호사를 만난 건 2014년이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그는 고려대 2학년 학생이었다. 미 해병대를 지원, 육군 중위로 입대한 그는 인천상륙작전 때 맥아더Douglas MacArthur와 같은 배에 올라 통역을 맡았다고 했다. 그가 인천에 온 이유는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앞에 세우는 한국전쟁기념비에 쓸 돌을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만석부두(레드 비치)에서 가져간 돌은 2016년 8월 샌프란시스코 프리시디오 국립공원 한국전쟁기념비로 태어났다. 만석부두와 월미도 일대를 함께 도는 동안 슬픔과 감격이 교차하는 듯한 그의 눈빛이 지금도 선연하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6시 월미도(그린 비치). 구축함의 함포 사격과 항공기의 폭격을 업고 맥아더는 상륙에 성공한다. 3일 만인 18일 오전 인천시청(현 중구청) 광장에서 표양문 임시 인천시장 취임식이 열릴 정도로 유엔군의 탈환은 신속했다. 남한 땅의 90%가 북에 점령당한 상황에서 인천상륙작전은 개시 13일 만에 서울을 수복하며 6·25전쟁의 판세를 바꿔놓는다. 9월 10일 네이팜탄 폭격을 시작으로, 작전 전개 과정에서 월미도는 65회에 이르는 항공기 폭격을 받아 섬 전체가 벌집처럼 변한다. 1995년 인터뷰한 한 참전자는 “섬의 형태를 몰라볼 정도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월미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때는 병자호란(1636) 이후다. 청나라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은 1656년 월미도에 국왕의 임시 거처인 행궁을 설치한다. 유사시 월미도로 피신했다 영종도를 경유, 강화도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19세기 후반 월미도는 국제 사건의 무대가 된다. 1866년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Pierre Gustave Roze 제독은 월미도에 장미섬Rose Island이란 이름을 붙여 해도에 기록한다. 임오군란(1882) 때는 일본공사인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월미도에 숨어 있다 영국 배 플라잉피시호를 타고 탈출한 일도 있었다. 1883년 제물포(인천항)가 개항지로 선택된 배경도 월미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월미도는 대형 선박이 언제든지 정박할 수 있고 영종도, 대부도 등 여러 섬에 둘러싸여 파도 걱정이 없다. 이런 월미도를 일본이 그냥 둘 리 없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4년 인천역과 월미도 간 철도를 부설, 군용 화물을 수송하며 월미도를 병참기지로 만든다. 조선을 강점한 이후인 1918년엔 월미도를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풍치지구로 지정한다. 도로와 공원 곳곳에 벚나무를 심고 화열차花列車를 운행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조탕과 수족관까지 만들었다. 밀물 때면 바다 위로 떠오르는 용궁각이란 요정도 운영했는데, 신문들이 ‘경인도시의 오아시스, 해상낙원의 극치’라고 떠들어댈 정도였다. 월미도 위락 시설은 광복 후 미 군정이 적산敵産으로 접수했고, 1948년엔 지역 유지들이 설립한 ‘월미관광주식회사’가 조탕을 재개장했으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70년이 흐른 2020년 월미도는 아름다운 역사문화 공간으로 부활했다. 숲이 울창한 월미산과 고즈넉한 전통공원, 이민의 역사를 펼쳐놓은 한국이민사박물관, 놀이공원을 찾아 사람들은 바다열차에 오른다. 네이팜탄 피해를 입은 월미도 주민들도 조례에 따라 지원을 받게 됐다. 6·25전쟁 70주년, 월미도는 다시 울창한 나무와 무성한 들꽃의 땅으로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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