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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호국보훈의 달-6·25 참전 유공자

2020-06-02 2020년 6월호

그 날의 기억, 나라를 위해 바친 푸른 청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청춘을 바친 6·25 참전 용사들은 호국보훈의 달 6월이 되면 가슴이 더 먹먹해진다.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던 순간, 전장에서 스러져간 전우의 모습 등 처참했던 당시의 참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올해는 6·25전쟁 발발 70주년이자 9·15 인천상륙작전 70주년을 맞는 해다. 전쟁 후 7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면서 그 참혹한 기억을 갖고 있는 세대들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그동안 잊고 살았다 해도 잠시라도 나라를 위해 싸웠던 분들을 기리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글 김윤경 본지 편집위원│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열다섯 어린 나이에 입대한 을지타이거여단

“지금도 눈을 감으면 고향이 떠올라. 평양에 살았는데, 이제는 뭐… 죽기 전에는 가볼 수 없는 곳이지.” 이춘자(89) 할머니의 시선이 허공을 향한다. 눈빛엔 많은 표정이 담겨 있다. 이내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아흔을 앞둔 그에게 그날의 포화 소리와 피란민들의 아우성은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평양 시내에서 피란 나올 때 사리원이 막힌 거야. 그래서 황해도 해주에서 연백으로, 연백에서 교동으로 들어온 거지. 교동 들어오는 갯벌에서 오빠는 인민군에게 잡혀가고, 엄마와 나랑 동생들만 간신히 빠져나왔어.”
그는 열다섯 살 꽃다운 나이에 교동에 주둔해 있던 을지타이거여단에 입대했다. 전쟁 통에 한입이라도 덜기 위해 군에 입대했지만, 그 전쟁이 3년을 훌쩍 넘길지 상상도 못했다. “그냥 군에 있으면 밥은 먹겠다 싶어서 열여덟 살이라고 나이를 속여 입대했는데, 전쟁이 그렇게 길게 갈지 몰랐지.”
저녁을 먹고 나면 으레 연대본부 마당에는 전투 준비를 마친 군인들이 가득했다. 매일 밤 치르는 전투. 쪽배를 타고 들어간 연백 쪽에선 ‘따다다다다’ 콩 볶듯 요란한 총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부대로 돌아온 쪽배에는 몇몇 전우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전투가 일상이었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었지.”



1951년 을지타이거여단 전우들과 함께.
(맨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이춘자 할머니)


강화군 교동면에 있는 ‘유격군 충혼전적비’에는 박창훈 할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우에서 부부로, 전쟁이 맺어준 인연

이 할머니는 부대에 주둔하는 통신병이었지만, 이왕 시작한 군 생활을 잘해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연안 첩보 작전을 수행하는 특수공작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 야무진 모습 때문이었을까. 같은 여단 소속이었던 박창훈(89) 할아버지는 전쟁 내내 이 할머니를 챙겼고, 정전 후 부부의 연을 맺었다.
박 할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이북과 접경 지역에서 첩보 활동을 한 미 극동사령부 산하 켈로(KLO) 특수부대 소속으로, 무수한 전투에 투입됐다. 해주 앞 용매도에서 작전 수행 중 부상을 입은 그는 다리에 난 총상의 흔적을 볼 때마다 열여덟 살 시절로 되돌아간다. “처음에는 다리에 돌멩이를 맞았나 했는데, 한참 뛰다 보니 뭔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드는 거야. 피가 흥건한 다리를 보고서야 총에 맞은 걸 알았지.” 총알은 왼쪽 다리를 지나 오른쪽 다리까지 관통했다. 그 부상으로 한창 자랄 나이에 성장이 멈춰버렸다. “살기 위해서 전투에 들어갔어. 참 비참한 상황이었지. 내가 살기 위해서는 싸워야 했거든. 지금도 전우들이 생생하게 기억나. 부모들이 그 자식을 얼마나 기다렸겠어. 우리 부모님도 날 기다리셨을 텐데.”
‘영변의 약산’. 김소월 시에 나오는 그 ‘영변’이 고향이었다. 일주일만 피해 있으면 전쟁이 끝날 거라는 말만 믿고 홀로 피란 나왔다.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세월은 흘러 강산이 일곱 번이나 변했다. “그래도 나중에 찾아보니 시집간 누이랑 매부가 애들을 챙겨서 부산으로 피란 왔더라고.”


전쟁이 잊힐 만큼 세월이 흘렀건만, 당시의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상황은 지금도 생생하고 또렷하다. 어린 나이에 참전한 전쟁은 그만큼 비참했다.
“전쟁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세대는 아마 우리가 마지막일 테지. 다시는 그런 비참한 상황이 일어나지 말아야 해. 지금 세대는 좋은 기억만 갖고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어. 다만, 우리 세대가 그 참혹함을 이겨냈다는 것만 잊지 않았으면 해.”
조국이 6·25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을 때, 나라를 위해 푸른 청춘을 모두 바친 세대들. 자신들의 젊음을 아프게 보냈다는 상처보다는 오히려 후손들을 걱정한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마음이 숙연해지는 이유다.


 
박창훈 할아버지와 이춘자 할머니의 10대 시절


인천의 6·25 참전 유공자
메시지전

인천보훈지청은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생존 참전 유공자가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자필로 적어 공공장소에 전시한다.


기간/장소
6월 22일~ / 연중 순회 전시
1차 전시
6월 22일~26일, 인천광역시청 1층 로비
2차 전시
미정, 지하철역 등 유동 인구 많은 구역 협의 중


우리 세대는 너무 고생을 하고 힘들게 살아왔는데,

여러분은 고생하지 않고 살았으면 합니다.

- 윤현구(85)​


전쟁이란  귀중한 목숨도 가족도 재산도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전쟁 없는 미래를 위하여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 황보수(87)



6·25는 온 국민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면서 두려움에 떨던 전쟁입니다.
꼭 기억해 줬으면 합니다.
- 이호우(87)


우리 전우 동지가 있어 나라를 구했습니다.
앞으로는 전쟁 같은 끔찍한 일이 없어야 되겠지요.
전우 동지들 감사합니다.
- 황인담(89)


코로나19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전쟁이라는 고통을 잘 이겨냈듯이 이번에도 이겨낼 것이라 믿소.
- 황기태(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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