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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⑤ 영화초등학교

2020-10-05 2020년 10월호

영화초등학교

영화로운 역사 영화로울 내일

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다섯 번째 등굣길을 따라 배다리, 그 추억의 거리로 향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이자, 근대 교육의 산실 영화초등학교. 128년 유구한 역사 품은 그 길을 조동희 총동문회장(65회 졸업)과 함께 걸었다.
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교육으로 피어난 찬란한 역사
1890년, 22세 꽃다운 나이의 선교사 마거릿 벤젤Margaret Bengel이 조선 땅을 밟았다. 서울 이화학당에서 성악을 가르치던 그는 이듬해 제물포 여성 선교를 위해 인천으로 파견된다. 그의 눈에 고루한 남존여비 사상에 억눌린 여성들이 들어왔다. 교육으로 그들을 돕고 싶었다. ‘서양 사람들은 조선 아이들의 간을 떼어다 약에 쓴다.’ 흉흉했던 시절, 학교를 세워도 학생들을 모으기란 쉽지 않았다. 강 씨 성을 가진 한 여자아이를 만났다. 벤젤은 아이에게 ‘세실리아’라는 서양식 이름을 지어주고 내리교회 방 한 칸을 교실 삼아 한글을 가르쳤다. 1892년 4월, 영화초등학교의 모태인 영화학당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초기에는 여성과 아이들을 함께 교육하다가 이후 여성 교육과 아동 교육을 분리해 보다 체계적으로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매일 학교인 제물포여자매일학교로 이어졌고요.”
1893년 5월에는 남자아이들을 위한 인천 최초의 교육 기관인 제물포남자매일학교도 문을 열었다. 설립자는 벤젤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온 남편 존스George Heber Jones 목사였다.
가르침의 열정과 배움에 대한 열망이 맞닿은 걸까. 1905년에 이르러 영화학당의 학생 수는 50여 명으로 늘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중구 경동 싸리재에 새로운 교사校舍가 지어졌고 교사敎師도 늘어났다. 그리고 1911년, 지금의 동구 창영동에 자리한 벽돌식 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1911년 세워진 영화초등학교 본관의 옛 모습.
지금도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찬란한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시대를 앞선 학교와 시대를 이끈 사람들
조동희(55) 총동문회장이 영화초등학교 구 교사 앞에 섰다. 학교의 오랜 역사 품은 붉은 벽돌 건물에는 그의 학창 시절 추억도 함께 봉인돼 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고학년들은 이곳에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어찌 이리 좁은 공간에서 40명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뛰놀았는지. 잘 보존해 준 학교에 고마운 마음입니다.”
제 역할을 다한 구 교사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이름을 올렸다. 현재는 학교의 유구한 역사를 알리는 전시관이자, 학생 오케스트라의 연습실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상 3층, 반지하 1층으로 지어진 이곳은 ‘미션 스쿨’답게 전형적인 주일 학교의 모습을 닮아 있다.
1911년 건립 당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2층 바닥은 조금의 삐걱거림도 없이 견고하다. 건물을 지을 때 단단하기로 소문난 백두산 적송赤松을 사용했는데, 지금도 바닥 곳곳 옹이를 잘라낸 흔적들이 남아 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3층 지붕은 ‘ㅅ’자 형태의 내부에 서까래가 노출된 ‘맞배지붕’이다.
도르래의 힘을 빌려 오르내리는 십자 형태 창문으로 둘러싸인 교실 벽면, 영화초등학교의 찬란한 역사와 함께한 이들의 면면이 펼쳐진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역 이길용 기자, 최초의 여성 박사 김활란, 유아 교육 개척자 서은숙 등 자랑스러운 ‘영화인’들은 시대를 선도했다.




구 교사校舍는 건립 당시 모습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맞배지붕’ 형태의 3층 내부의 모습이 고풍스럽다.


최초의 사학에서 최고의 사학으로
신관 건물을 둘러보는 조동희 총동문회장의 표정이 흐뭇하다. 128년의 역사, 그 이면에 어제보다 더욱 찬란한 오늘이 있다. 교실과 복도 할 것 없이 학생을 위한 공간 그 자체다. ‘학교는 공부’라는 일방적 공식에서 벗어나, 교육 공간이 지닌 힘을 믿고 쉼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혁신하기 위한 학교의 노력이 돋보인다.
영화초등학교는 인천광역시교육청 공모 사업에서 남다른 성과를 거뒀다. 학교 인프라 개선과 관련된 모든 예산을 공모를 통해 확보했을 정도다. 오는 12월에는 미래 교실 조성 사업도 시작된다. 미래 교실은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의견을 개진해 만들어가는 열린 공간이다. 또 예측하기 힘든 뉴 노멀 시대를 선도하기 위해 전교생에게 스마트 패드를 대여하고, 모든 교실에 무선 APAccess Point를 설치해 실시간 쌍방향 원격 수업도 진행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춘 유튜브 채널을 통한 다양한 학습 자료 탑재 서비스는 영화초등학교만의 자랑이다.
“학창 시절 학교로부터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졸업생들의 자부심과 애교심이 남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고요. 세월이 흐른 지금도 후배들이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뿌듯합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도 몇 번의 시련은 있었다. 그때마다 학교를 일으켜 세운 것은 교사와 학부모, 동문들의 관심과 애정이었다. 수준 높은 교육 서비스와 콘텐츠를 제공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 사학私學의 숙명. 영화초등학교는 과거에 머물지 않은 변화와 혁신을 통해 최초의 사학에서 최고의 사학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김한청 교장(사진 오른쪽)과 조동희 총동문회장.
영화초등학교는 최상의 교육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유롭고 따뜻했던 어린 날
가수 겸 작곡가 김광진(63회 졸업)

1994년 발표되어 서정적인 가사와 멜로디로 큰 사랑을 받았던 ‘마법의 성’.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유명한 이 노래를 작곡하고 부른 가수 김광진은 자랑스러운 ‘영화인’이다. 그는 영화초등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자신의 학창 시절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 회상한다. 당시 100명 남짓한 학생들과 내리 6년을 함께 보내며 쌓은 수많은 장면들, 마음껏 뛰놀던 운동장, 바로 옆 창영초등학교 학생들과의 불꽃 튀는 눈싸움마저도 소중한 추억거리다. 2017년 4월에는 그가 학창 시절 매일같이 거닐던 ‘배다리’를 주제로 한 노래를 발표하며 고향과 모교에 대한 애정을 음악에 담아내기도 했다.
태어나 자란 동네 / 배가 들어왔던 다리래 /
배도 다리도 이제는 없지 / 예쁜 이름만 거리에 남아 / 헌책방 많던 동네 /
교복 입은 친구들 모여 / 깔깔 이야기가 너무 많아  
- 김광진의 노래 ‘배다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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