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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의 아침-5·3항쟁 35주년, 인천의 봄

2021-04-30 2021년 5월호


5·3항쟁 35주년, 인천의 봄

지금은 시민공원이 된 옛 인천시민회관 광장은 ‘대통령 직선제’와 ‘언론 자율화’를 이끌어낸 ‘6월 항쟁’의 불씨 ‘5·3항쟁’(1986년 5월 3일)이 전개된 역사의 현장이다. 

시민회관 광장 5·3항쟁 기념석 뒤로 시민들이 오가고 있다.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독재 타도!” 35년 전인 1986년 5월 3일 주안. ‘인천시민회관’ 앞 광장은 물론이고 사거리 도로까지 점거한 군중들의 함성이 인천 하늘에 메아리쳤다. 재야운동가, 노동자, 학생들로 이뤄진 5만여 명의 인파 속에서 ‘군사 독재 타도, 민중 생존권 확보, 미일 외세 축출’ 구호가 터져 나왔다. 1985년 2·12 총선에서 ‘직선제 개헌’ 공약으로 돌풍을 일으킨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이 되면서 ‘개헌추진위 인천·경기지부 결성대회 및 현판식’을 갖기로 한 날이었다. 그런데 행사 2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더니 순식간에 민주항쟁 들불로 타올랐다. 5·3항쟁은 이듬해 6월항쟁에 불을 댕겨 ‘대통령 직선제’와 ‘언론 자율화’를 이끌어낸다. 이날 행사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최대의 민주화운동으로 기록됐다.
인천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개항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노동운동이 출발이었다. 일제의 쌀 공출에 따른 정미업으로 시작된 인천의 산업화는 점차 제염, 양조, 경공업으로 확장된다. 1912년 비누 공장 애경사, 1917년 성냥 공장 조선인촌주식회사, 1925년엔 열차를 제작하는 인천공작창 같은 크고 작은 공장들이 문을 열었다. 때맞춰 조선노동공제회 인천지회(1920)와 인천소성노동회(1923)가 결성되면서 노동운동은 조직화하기 시작한다. 1930년대엔 조선총독부의 대륙 병참 기지화 정책에 따른 육군조병창까지 들어서며 인천의 노동운동은 점차 활성화돼 간다.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이어진다. 전후 인천항은 재건에 필요한 구호 물자가 들어오는 주요 통로였다. 부평엔 미 군수지원사령부인 애스컴ASCOM이 들어섰고 제분·제당·면방직 등 삼백三白공업과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이 활기를 띠었다. 여기에 1960년대 중반 부평공단을 필두로 주안공단, 남동공단이 조성되며 인천은 거대한 공업 도시로 성장한다. 노동자들의 수도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열악한 근로 조건과 임금 수준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옥죄는 군사정부의 탄압은 더욱 혹독한 것이었다. 노동쟁의가 빈번해지고 ‘동일방직 똥물 사건’과 같은 심각한 노동 탄압과 인권 침해가 만연한다. 노동자들은 격렬하게 저항했고 뜻있는 사람들과 의식 있는 학생들이 젊음을 바쳤다. 학생, 노동자, 재야인사 가리지 않고 며칠 밤낮을 거꾸로 매달려 악랄한 고문을 받은 끝에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고 나서야 풀려나는 시대였다. 하지만 수많은 학생들과 활동가들이 신분을 숨긴 채 인천지역 노동 현장 곳곳에 들어가 ‘노동·민주화운동의 성지 인천’을 만들기 위한 벽돌 한 장씩을 쌓아올렸다.
인천 5·3항쟁은 그렇게 우리나라 노동·민주화운동의 거대한 물줄기로 흐르며 민주화를 크게 앞당긴 사건이다. 군사독재정권 퇴진과 대통령 직선제를 이끈 최초의 불씨로 평가해야 한다는 여론이 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5·3항쟁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이 정한 민주화운동 범위에 포함시키는 ‘인천의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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