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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 문화재 이야기 ⑤ 홍예문(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9호)

2021-04-30 2021년 5월호

115년 전

조선인 피땀으로 건설한

중구와 동구의 소통길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2021년 4월 중순, 봄비가 내린 뒤 중구 방향에서 바라본 홍예문 전경

이쪽에서 가던 차가 입구에서 잠시 멈추자 저쪽에서 차가 넘어온다. 반대편 차선의 차가 완전히 지나가자 멈춰 있던 차가 비로소 출발한다. 차끼리 기다려주기도 하고 사람과 차가 서로 양보를 하기도 한다. ‘홍예문’(인천시 중구 송학동2가 20)은 그렇게 서로에게 길을 내어주며 115년 세월을 지나왔다.
신포동과 동인천, 중구와 동구를 잇는 홍예문의 홍예虹霓는 ‘무지개’ 혹은 ‘아치’란 뜻을 지닌다. 폭 4.5m, 높이 13m의 홍예문은 작은 터널이라고 할 수 있다. 터널을 뚫기 시작한 시기는 1906년이다. 러일전쟁(1904)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인의 수는 6,000명 정도였다. 그런데 2년 만에 두 배가 넘는 1만3,000여 명의 일본인이 모여든다. 일본은 자국민을 분산시키기 위해 지역을 확장할 궁리를 짠다. 신포동 방면에서 동구 만석동이나 동인천역으로 넘어갈 때 화평동이나 내동 쪽으로 빙 둘러서 가지 않고, 직접 넘어가는 길이 필요하기도 했다. 방법은 중구와 동구의 경계에 있는 응봉산을 뚫는 것이었다.
1906년 뚫기 시작한 홍예문 건설은 1908년 완공한다. 문제는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이 대부분 조선인 노무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발파기도 없이 조선인들은 곡괭이 같은 원시적 도구로 거대한 암벽을 부수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조선인 노무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암벽이 사라진 자리에 쌓기 좋게 다듬은 화강암이 들어갔고 천장은 빨간 벽돌로 마감했다. 일본인들은 홍예문을 구멍이라는 뜻의 아나문(穴門)으로 불렀으나, 조선인들에겐 피로 뚫은 혈문血門일 수밖에 없었다. 홍예문은 비슷한 시기 준공한 신흥동 긴담모퉁이길과 함께 일제가 자랑하는 대역사였다.
홍예문이 완공된 이후 여러 가지 이야기와 사건이 일어났다. 우선 홍예문 위에서 소변을 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전한다. 고일 선생의 저서 <인천 석금>은 홍예문 위에서 지키고 있다가 일본 순사들이 지나가면 오줌을 누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 여자가 노상 방뇨를 하다 조선인의 발길질에 엉덩이를 걷어채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홍예문을 건설하면서 겪은 조선인들의 극심한 피해 의식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다. 산업화를 지나던 어려운 시기 홍예문 위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한때 홍예문을 이루는 벽면을 따라 넝쿨이 뒤덮였으나 보존 문제가 대두되면서 지금은 석축이 그대로 드러난 상태다. 홍예문은 지금도 여전히 중구와 동구를 잇는 소통의 상징으로 길을 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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