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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 문화재 이야기⑥ 부평도호부관아(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호)

2021-06-01 2021년 6월호


부평에서 구로까지 다스린 옛 영화의 흔적 남아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남동구 ‘간석오거리’를 경계로 택시요금이 달랐던 때가 있었다. 인천에서 부평 방면으로 넘어갈 경우 2,000원 정도 가산금이 붙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외지 사람들은 “같은 인천인데 왜 요금이 다르냐”며 택시기사와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부평과 인천은 다른 지역이었다. 지리적으로도 한남정맥(안성 칠장산에서 시작해 김포 문수산을 잇는 산줄기)이란 산줄기를 경계로 나뉘어 있었다. 산줄기 남쪽으론 인천도호부관아(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호)가, 북동쪽으로는 부평도호부관아가 각각 들어섰다. 조선 시대 인천도호부관아는 문학산 아래 일대와 제물포 지역을 관할한 반면, 부평도호부관아는 15개면에 이르는 광활한 행정구역을 다스렸다. 지금의 부평·계양·서구는 물론이고 부천, 서울 구로구의 온수·오류동 일대, 강서구 개화동과 김포공항 일대, 광명시 천왕역 주변까지가 부평도호부 관할 지역이었다. 청사의 규모도 상당했다. 축구장 4배 크기의 땅에 27개 동 232칸의 건물들이 있었다고 <부평부읍지>는 전한다.
부평도호부관아를 지은 시기는 고려 성종 14년(995)이다. 이후 900년 동안 부평 일대를 통치했으나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건물이 헐리고 만다. 관아가 헐린 자리에 부평초등학교 전신인 부평공립보통학교 건물이 들어선다. 불행 중 다행으로 1개 동이 남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채 보존되고 있다. 이 건물은 수령이 정무를 집행하던 ‘동헌’이나 기거하던 ‘내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여섯 칸, 측면 두 칸 크기의 ‘ㅡ자형’ 건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부평도호부관아 건물 앞엔 정조대왕이 계양 지역을 찾았을 때 활을 쏘았다는 ‘어사대’와 손을 씻었다는 ‘욕은지’가 있다. 사도 세자의 아들로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무덤인 수원의 ‘현륭원’에 능행을 다녀오곤 했다.
역적(사도 세자)의 아들이 국왕으로 즉위했다는 사실은 조선 사회에서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정조는 이에 사도 세자의 호칭을 장헌 세자로 바꾸고 양주 배봉산에 있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긴다. 정조는 24년 재위 기간 66차례나 궁궐 밖 행차를 했는데 이 가운데 13번이 수원을 방문한 것이었다. 1797년 8월 15일~19일 수원 융릉 참배 일정에 나선 정조는 16일 오전 부평 행궁에 도착해 어사대에 머물며 활을 쏘고 자신을 반겨주는 백성들과 소통의 시간을 갖는다. 부평민의 환대를 받은 정조는 계양을 칭송하는 ‘어제시’를 지어 하사하고 욕은지에서 손을 씻은 뒤 수원 화성으로 향한다.
부평도호부관아 한편엔 6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서 있다. 높이 25m의 이 은행나무는 조선 태종 18년(1418) 부평도호부관아를 새롭게 완공하면서 관청 건물 주변을 꾸미기 위한 풍치목으로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관아 옆 도호부사를 지낸 18명의 수령과 경기도 관찰사 3인의 선정비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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