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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 줌인-사진기자 박근원의 사진첩

2021-06-01 2021년 6월호

찰나의 인천
철로 위에 널빤지를 올려놓고 널뛰기를 하는 소녀들, 깨진 블록과 화염에 휩싸인 자동차. 인천시립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에선 지금 1960~1970년대의 향기가 솔솔 풍겨 나온다. ‘찰나의 인천’ 사진전이 열리는 중이다. 전시 작품은 사진기자 출신 원로 사진가 박근원(82) 씨가 기증한 흑백사진들로 꾸며졌다. 평범한 이웃의 일상, 사건, 풍경 등 전시는 3부로 기획됐다. 전시는 오는 6월 20일까지며, 7월 중순부터 인천시청역 열린박물관에서 2차 전시를 진행한다. ‘사진 속 인천, 그때 그 시절’로 들어가 본다.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사진 제공 박근원



# 철로 위의 소녀들(1978)
가난했던 시절, 기찻길은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였다. 소녀들은 널뛰기나 고무줄놀이를 했고 사내아이들은 못이나 병뚜껑을 철로 위에 얹어놓은 채 열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천천히 지나가는 화물차 칸에 올라타는 간 큰 아이들도 있었다. 수인선 용현역(현 인하대역) 근처. 세 명의 소녀가 철로 위에 널빤지를 얹고 널뛰기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위태롭다기보다 정겨워 보인다.



# 인천공설운동장(1978)
인천공설운동장은 축구, 야구, 육상 등 빅 이벤트가 펼쳐지던 인천의 랜드마크였다. 1934년 지금의 자리에 들어섰는데 영어의 ‘그라운드Ground’와 우리말 ‘운동장’을 조합해 ‘그라운동장’이란 별칭을 갖고 있었다. 나중에 인천숭의종합운동장이라 이름을 바꿨다가 2012년 지금의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들어섰다. 전국체육대회가 열린 어느 날, 한 갓을 쓴 ‘양반’이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 초등학교 운동회(1977)
1970년대 운동회는 소풍과 더불어 아이들의 2대 축제였다. 운동회가 열리는 날은 김밥과 삶은 달걀, 사이다를 먹을 수 있었고, 달리기를 잘하면 연필과 공책을 상으로 타 갈 수 있었다. 문학초등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렸다. 하얀 운동복을 입고 타이어를 굴리는 개구쟁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난다. 사진 왼쪽 위 ‘때 려 잡’이라는 표어가 눈에 들어온다. ‘반공’이 국시이던 시절 ‘때려잡자 공산당’이란 구호가 거리 곳곳에 걸려 있었다.



# 인천의 센강 수문통(1984)
화수부두에서 송현동을 거쳐 배다리까지 이어진 물길이 있었다. 그중 현재의 화평파출소~송현파출소 약 300m 갯골 수로를 사람들은 ‘수문통’이라고 불렀다. 지대가 낮다 보니 인근 지역 생활하수가 이곳으로 흘러들었다. 이따금 사산아死産兒나 탯줄을 싼 시멘트 봉지가 떠다니기도 했다. 여름철이면 악취가 코를 찌르는 ‘똥바다’였지만 사람들은 수문통을 ‘세느(센)강’이라 불렀다. 20여 년 전 수문통은 완전히 복개돼 지금은 도로와 주차장이 되었다.


# 9·28서울수복기념
   제3회 국제마라톤대회(1966)
한국전쟁 당시 서울수복을 기념하기 위한 마라톤이 1966년 10월 30일 열렸다. 이 대회엔 한국전쟁 참전군이면서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1960 로마, 1964 도쿄)인 아베베 비킬라Abebe Bikila가 참가했다. 아베베는 인천 중구 해안동 로터리를 출발해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 광화문까지 42.195km를 달렸다. 아베베가 경기 시작 전 다리 검사를 받고 있다.


# 인천직할시대 개막(1981)
1981년 인천시가 경기도에서 분리돼 인천직할시로 승격했다. 당시 인천직할시청은 지금의 중구청으로 김찬회 인천시장과 서정화 내무부장관이 함께 현판을 붙이는 모습이다. 인천은 이후 1995년 인천광역시로 발돋움하며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오는 7월 1일 인천시 독립 40주년을 맞는다.


# 5·3민주항쟁(1986)
독재 타도. 1986년 5월 3일 주안시민회관 사거리에 5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재야운동가와 학생, 노동자들로 이뤄진 집회 참가자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1985년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급부상한 신민당이 열려 했던 ‘개헌추진위 인천·경기지부 결성대회 및 현판식’은 순식간에 민주화 촉구 시위로 타올랐다. 6월 항쟁에 불을 붙인 5·3항쟁이다.
‘신한민주당 헌법개정 추진 인천경기지부 결성대회장’이라 쓴 플래카드와 ‘이민우 총재, 김대중 선생, 김영삼 선생 내인 환영’ 플래카드가 시민회관 앞에 붙어 있다. 불타는 자동차 앞에서 한 시민이 ‘전두환은 헛소리 말고 물러가라’란 1인용 피켓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영원한 사진기자 박근원
격동기 인천의 역사, 반세기 동안 기록하다

“사진이 없었다면 박근원이란 사람도 없었을 거야.”
박근원(82)은 사진작가가 아니라 ‘사진기자’다. 1970년 연합신문에 입사해 인천일보(1988), 기호일보(1997)를 거치며 사진기자로 활약해 왔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박 기자는 한국전쟁 때 아버지의 배를 타고 화수부두로 왔다. 배 안에서 수개월을 살던 그의 가족은 화수동 77번지에 정착한다. 비가 줄줄 새는 판잣집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를 졸라 펜탁스 카메라를 얻은 그는 인천 곳곳을 누비며 닥치는 대로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역사적 사건 현장, 일상의 풍경 등 반세기 동안 인천을 기록해 왔다. 평생 찍은 사진 중 3,000여 장을 선별해 인천시립박물관에 기증한 때는 5년 전이다. 그 가운데 43점을 추려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
2007년 언론 부문 인천시문화상을 수상한 박근원 대기자는 현재 약간의 난청에 알츠하이머 초기 증세를 보이는 것을 빼면 비교적 건강한 편이다.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카메라를 메고 다시 현장으로 달려갈 생각이다. 교동도 출신의 아내 조순옥(74) 여사와의 사이에 진화(55, 화가), 진숙(51, 연주자), 진영(48, 문인) 세 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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