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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⑰ 인천신흥초등학교

2021-10-05 2021년 10월호


찬란한 역사를

새로운 내일로


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열일곱 번째 등굣길을 따라 중구 답동으로 간다. 계절을 닮은 꿈과 희망이 알알이 영글어가는 인천신흥초등학교. 왕년의 빛나는 영광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며 명문의 뿌리를 지켜가는 그 길을 조각가 고정수 작가(14회 졸업)와 함께 걸었다.


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추억의 조각들로 완성되는 하나의 작품

가을 햇살 내려앉은 교정. 한 노신사가 익숙한 듯 교문을 들어선다. 60년 가까운 세월을 거슬러 다시 찾은 학교는 여전히 정겹고 포근하다. 만추를 향해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옛 시절을 반추한다. 인천이, 그리고 신흥이 낳은 대한민국 미술계의 거장 고정수(75) 작가가 모교를 찾았다.
“건물은 말끔하게 변했지만, 모든 게 예전 그대로예요. 답동성당도 여전하고. 지금도 학창 시절 기억이 선합니다.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었지요.”
집이 있던 신흥3가에서 학교로 오가던 길은 온통 추억투성이다. 학교 근처 만화방도 참 많이 다녔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5,000명의 학생들이 교실을 가득 메웠다. 오전과 오후로 나눠 수업을 받고 비좁은 운동장을 달리며 꿈을 키웠다.
“당시는 정말 대단했었어요. 학교에 밴드부도 있고 동물원도 있었다니까. 다른 학교에서 엄청 부러워했었지요. 육상부도 유명해 대회만 나갔다 하면 매번 트로피를 안고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고정수 작가의 모교 사랑은 각별하다. 국내 최고의 조각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자양분을 모두 학창 시절 얻었다고 여길 정도. 그림을 좋아했던 아이, 아낌없는 칭찬과 격려로 꿈을 응원해 준 선생님과 친구들이 있었기에 자신감을 얻었다. 이제는 그 빚을 갚고자 한다. 고정수 작가는 늦가을 즈음 모교에서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후배들에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학교에 의견을 전했고, 윤정열(55) 교장이 흔쾌히 승낙하며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대선배이자 최고 작가의 최고 작품을 눈앞에서 감상하는 귀한 시간이 신흥초 아이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중구 답동에 자리한 인천신흥초등학교 풍경. 대한민국 대표 조각가 고정수 작가에게 지난 학창 시절은 추억이자 영감靈感이다.  


신흥의 역사는 현재진행형

신흥초의 탄생은 개항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바닷길이 열린 이후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늘면서 학교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에 1884년 4월 1일 일본인 자녀를 교육하기 위한 소학교 형태로 개교한 것이 신흥초의 출발이었다. 신흥초가 오늘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광복 후 1946년이다. 3월 15일 개교식을 거쳐, 같은 달 31일 인천신흥국민학교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진정한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신흥초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창영초와 더불어 인천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였지요. 지금도 동문들과 자주 연락하고 만날 정도로 학교에 대한 선배들의 애정이 남다릅니다. 후배들도 신흥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큰 꿈을 꿨으면 좋겠어요.”
윤정열 교장이 앞장서 운동장 한편 2층 건물로 고정수 작가를 안내한다. 그곳에는 신흥의 오랜 세월이 집약된 역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교실로 쓰지 않는 공간을 활용해 찬란했던 시간을 담았다. 지금은 없어진 교복부터 빛바랜 앨범, 수많은 트로피까지. 명문 중 명문으로 손꼽혔던 학교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1953년 입학해 1958년 학교를 마쳤습니다. 당시 앨범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롭네요. 소중한 공간을 마련해 준 학교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앞으로도 이곳에 의미 있는 역사의 장면들이 차곡차곡 쌓이기를 기대합니다.”



사용하지 않는 교실을 활용해 조성한 역사관. 신흥의 오랜 전통이 한곳에 집약되어 있다.



“위기는 곧 기회라” 말하는 윤정열 교장이 활짝 웃고있다.



학교의 교육철학 ‘큰 꿈 큰 사랑’이 새겨진 기념비

위기는 곧 기회
신흥초가 자리한 중구 답동은 과거 신포동과 함께 인천에서 가장 번화한 동네였다. 그 덕에 학교 역시 많은 관심을 받았고, ‘웬만해서는 신흥초에 못 온다’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도시의 변화와 함께 동네도 변해갔다. 이사 오는 사람보다 이사 가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만큼 아이들의 목소리도 줄었다.
“원도심에 있는 학교들의 상황이 다 비슷해요. 과거의 명성을 좇기보다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 끊임없이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밖에서 바라보는 신흥초는 위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윤정열 교장과 교사들은 오히려 기회라 믿고 학교의 밝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비교적 젊은 층으로 구성된 교사진은 여느 신도시 학교와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교육한다. 지역 특성상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많은 것도 오히려 장점으로 여긴다. 학생들은 ‘다양성’이라는 세계적 키워드를 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체험과 공감으로 습득하며 글로벌 인재의 꿈을 꾸고 있다.
“신흥이라는 좋은 뿌리를 가진 아이들이 선생님들의 따스한 관심과 사랑으로 저마다의 큰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남들은 위기라고 할지 모르지만, 신흥의 오늘은 분명 차별화된 기회라는 것을 모두가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청명한 가을 하늘과 어우러진 답동성당 모습. 성당은 학교와 함께 오랜 시간 한자리를 지켰다.



신흥을 빛낸 사람들
배우 최불암(8회 졸업)

금곡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최불암은 지금도 고향 인천을 종종 찾는다. 모교에서의 남다른 추억도 있다. 최불암은 1994년 한 제과 회사의 광고에 출연했는데, 당시 배경이 신흥초였다. 최불암은 광고 출연료 전액을 모교에 기부하며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찾은 모교의 낡은 책걸상을 본 뒤, 후배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었다.


가수 송창식(15회 졸업)
신흥초 시절 송창식은 ‘이상한 아이’로 통했다. 성적도 좋고 음악 실력도 출중한데, 행동이 어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학교에서 꽤나 유명한 학생이 됐다. 3학년 때부터 반장을 하며 이전과는 다른 적극적인 성격으로 성장했고, 5학년 때는 학예회에서 연극 주인공을 맡을 정도로 끼가 넘쳤다. 공부도 잘했던 송창식은 인천의 명문 인천중학교를 무시험으로 입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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