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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스케치에 비친 인천-송도갯벌

2022-05-03 2022년 5월호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사라진 바다를 그리며, 사라질 바다에서 살아가는 ‘먼우금’ 사람들. 그 짠 내 가득한 삶을, 최원숙 화백이 그렸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임학현 포토 디렉터


송도어촌계2,
2020, 혼합 재료, 57.5×42cm
물때만 맞으면 밤이고 새벽이고 바다로 달려나가는 삶.
먼우금 사람들은 평생 차디찬 바람 맞으며 갯벌에 뒤엉켜 살아왔다.

땅에 갇힌
바다

우리가 아는 송도가 아니다. 개발이 한창인 송도국제도시 6·8공구, 무섭게 내달리는 덤프트럭을 피해 공사장 안으로 들어간다. 척박한 땅을 지나자 눈앞에 수평선이 아득히 펼쳐진다. 지금 발 딛고 선 이 땅도 한때는, 바다였다.


오전 9시, 흙먼지를 날리며 트럭이 하나둘 도착한다. 아직, 바다의 들숨과 날숨에 호흡을 맞추며 살아가는 척전어촌계 사람들이다. 물참엔 나룻배질을 하고 잦감이면 걸어다니던, 멀고도 가까운 바다 ‘먼우금’. 미추홀구 용현동에서 연수구 옥련동, 청학동, 동춘동을 아우르는 너른 바닷가 벌판엔 백합이며 모시조개, 바지락, 동죽, 꽃게, 낙지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연평도 게보다 송도 게를 더 높이 쳐주던 시절이었다.
박길준(78) 척전어촌계장은 소암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 라마다 송도 호텔이 서 있는 그 자리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 앞까지 파도가 밀려들었다. “황금 바다였어. 그 귀한 백합을 20kg, 30kg씩 거뜬히 캐냈으니까. 1kg당 가격이 5,000원, 당시 월급쟁이 한 달 벌이를 하루에 다 벌었지.”
몸만 부리면 배는 안 곯고 살았다. 아이들도 일찌감치 학교 대신 바다로 나갔다. 바다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제 모든 것을 내주었다. 기꺼이 품어 안았다. 그 바다가 사라져간다.


땅끝 바다의 시작점.
눈앞에 수평선이 아득히 펼쳐진다.
지금 발 딛고 선 이 땅도 한때는, 바다였다.


송도 갯벌에서 캔 키조개를 들어 보이는 오세철 씨



송도국제도시 6·8공구, 거대한 신도시 앞바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치열한 삶의 몸부림이 있다.


그래도,
바다로 바다로

동막, 척전, 시듬물, 신촌, 박젯뿌리…. 송도 갯벌에 기대어 먹고살던 마을이다. 지금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1980년대 한적하던 바닷가 마을에 포클레인이 나타나 대대로 살던 집들을 때려 부수었다. 1985년 남동구 소금기 가득 밴 물기 어린 땅이 콘크리트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 위로 시커먼 공장 굴뚝이 솟아났다. 바다가 메말라갔다. 끝이 아니었다. 1994년엔 덤프트럭이 송도 바닷가에 쉴 새 없이 오갔다. 그리고 오늘, 번쩍번쩍 빛나는 거대한 신도시가 들어섰다.
“꿈에도 생각 못 했어. 내가 살던 동네, 이 바다가 사라져버릴 줄은….” 바다는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줄로만 알았다. 이제, 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정 어업면허가 만료되는 2027년이면 바다를 영영 떠나야 한다.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단히도 오늘을 살아낸다. 어른 키의 세 배는 훌쩍 넘는 가파른 사다리를 타고 방파제 너머 삶의 터전으로 향한다. 고작 스티로폼 조각에 몸을 맡기고 바다로, 바다로 나아간다.



송도어촌계1,
2020, 혼합 재료, 72×42cm
송도 갯벌은 먼우금 사람들에겐 눈물겨운 생존의 터전이다.
그 안에서 허리가 굽고 주름살 패도록, 평생 삶을 일구어왔다.


​송도 바다에는 아직, 마천루가 즐비한 도시와는 다른 시간이 흐른다.


다시,
물에서 뭍으로

썰물이 지면서 갯벌의 굴곡이 어지럽게 드러난다. 바다로 나가는 대신 때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바다가 품을 허락하는 시간은 단 세 시간. 서둘러야 한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온몸이 갯벌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바닷사람들이 열 발자국 성큼 나가는 사이, 간신히 두세 걸음을 뗄 뿐이다. 아차, 갯벌에 발목을 잡혔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지형근 어르신이 안쓰러워하면서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매일 옷 말끔히 차려입고, 차 끌고 출근할 거 아니야. 뭣 하러 예까지 와서 흙탕 칠하며 사서 고생이야.” 그 괜한 고생길이, 누군가에겐 고단해도 쉬지 않고 감당해야 하는 삶의 일부다.
바다의 시간이 끝나간다. 순간 갯벌에 물이 차오른다. 갯길을 따라 스티로폼을 끌고 사람들이 하나둘 뭍으로 향한다. ‘돼지엄마’가 일등으로 작업복을 벗는다. “요즘, 잡이가 영 시원치 않네.”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이맘때면 주꾸미며 꽃게가 척척 걸려들어야 한다. 그래도 6kg짜리 광어를 낚았으니 일진이 그리 나쁘진 않다. 이웃에게 잡은 삼세기를 척하고 건네며 인심도 쓴다. 이 맛에 바다 일을 놓을 수가 없다.



쪼그라든 바다,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늘을 살아낸다.
높다란 방파제 너머 생존의 장으로,
고작 스티로폼 조각에 몸을 맡기고 바다로,
바다로 나아간다.


​하루 일하면 고작 2~3만 원이 손에 쥐여진다.

​그래도 여전히 품을 내어주는 바다가 고맙다.


거대한 도시에 떠밀려 쪼그라든 바다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허리 한 번 펴지 않고 쉼 없이 갯일을 하는 먼우금 사람들의 등 뒤로 보이는 인천대교의 실루엣이 장엄하다.
그렇게 우리가 잊고 있던, 송도 바다 한편에 봄이 흘러가고 있다.


육지가 아직,
‘바다’라면

세상에 절실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안개가 끼고 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기어이 바다로 나가야 하는 것이 바닷사람의 운명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돌아오지 못했다.
오세철(59) 씨의 아버지는 바다에서 생애 마지막 길을 떠났다. 1976년을 한 달 남긴 겨울, 짙은 해무가 온 바다를 휘덮은 날이었다. 서울 사는 고모에게 줄 갯것을 캐오겠노라며, 집을 나서던 뒷모습이 그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이었다. 다섯 형제가 아버지만 바라보며 살았었다. 삶을 지탱해야 했다. 어린 동생들은 바다 근처에도 못 가게 하면서, 아버지를 삼켜버린 갯벌에서 악착같이 삶의 희망을 캐냈다. 그의 나이 열두 살 때였다. 어느덧 육십이 다 된 아들은 오늘도 ‘아버지의 바다’를 지킨다.


앞으로 5년.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를 내어주는 대신, 인천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도시가 됐다. “바다를 딛고 우뚝 솟은 아파트 단지를 보고 있으면, 어느 날은 신기루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파트 좋지. 하나 건물이 높이 솟으면 그 옆엔 그늘이 지기 마련이야.” 오 씨의 집은 낮은 빌라촌에 있다. ‘조개딱지’가 있어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들 세상이 될 수 없었다.


갯벌과 땅, 그 가치의 무게는 어디로 기우는 것일까. 내일에서야,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송도어촌계4,
2020, 아크릴, 45.5×33cm

새가 도시의 하늘 위를 날다 갯벌 위에 앉는다.
바다가 도시가 되어온 시간, 자연은 앞으로 또 무엇을 내주어야 하는가.


삶이 계속되는, 송도 갯벌.
뒤로 보이는 인천대교의 실루엣이 장엄하다.


​송도 바다에는 아직, 마천루가 즐비한 도시와는 다른 시간이 흐른다.


그림 최원숙
인천에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바다가 있다. 동해에서 떠오른 태양은 세상이 검기울면 서해 너른 바다, 갯벌에 머문다. 지는 해가 머물러 흐르는 그곳엔, 평생 갯벌에 뒤엉켜 살아온 먼우금 사람들이 있었다. 작가는 송도국제도시 개발의 뒤안길 어디인가로 떠밀려갔을 그들 삶을 이야기한다. 동덕여자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수십 차례의 개인전을 열고 아트페어에 참가하며 그림 안에서 살고 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자 인천미술협회 이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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