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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 클로즈업

2022-10-04 2022년 10월호


백성의 마음 , 나라를 지킨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중심성사적비는 개항기 부평부사 박희방이 백성들의 뜻을 모아 쌓은 ‘중심성’을 알리는 비석으로 현재는 받침돌(귀부)만 남아 있다.

사진은 서구청 앞에 있던 받침돌의 모습.

계양산성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놓여 있다. 우툴두툴하게 거칠어진 표면, 모서리가 둥글고 직사각형의 홈이 파인 바위는 뭔가 깊은 사연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바위의 이름은 ‘중심성사적비 귀부衆心城 事蹟碑 龜趺’이다. ‘귀부’는 거북이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을 말한다. ‘중심성’은 어떤 성이며, 이 받침돌은 어떻게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일까.
개항기인 18세기 후반 고종은 도성과 가까운 인천 연안 방비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 서양의 침략과 계속되는 이양선 출몰 때문이었다. 
강화도에 이어 1875년 영종도까지 점령당하며 수도 한양을 지키던 인천의 연안 방어선 구축은 시급한 현안이었다. 
적들이 인천 연안에 상륙해 부평로를 따라 진격할 경우 최단 시간에 도성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부평로는 도성을 출발, 양화진에서 한강을 건너 철곶포(양평동)~고음 달내현(화곡동)~부평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고종이 1879년(고종16) 서구 연희진과 동구 화수동에 화도진 축조를 명하면서 2개의 진지가 설치된다. 그러나 1880년(고종17) 인천의 개항이 결정되면서 1882년(고종19) 연희진은 폐지되고, 화도진은 훈련도감 아래로 들어간다. 
시름에 빠져 있던 고종은 1883년(고종20) 10월 연희진을 대신할 군사시설인 중심성 축조를 명한다. 그렇게 지금의 서구와 계산동의 경계선인 경명현(징매이고개)을 중심으로 동서 능선을 따라 성이 축조된다. 동쪽으로 171m, 서쪽으로 297m, 성문이 3m로 총연장 471m에 이르던 성이었다. 
당시 성을 쌓은 주인공은 부평부사 박희방이었다. 박희방은 주민들의 성금과 노동력으로 설치했다는 의미로 중심성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는 관문인 ‘공해루’ 대들보 위에 ‘부평팔경’ 편액을 써서 걸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김영덕(67) 인천서구향토문화연구소 소장은 “박희방은 이순신 장군 이래 문무를 겸비한 조선 시대 최고의 지방관 중 한 명”이라며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손자병법>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1990년대 경명현 고개 현장에 있던 귀부의 모습.

중심성사적비 받침돌은 지난 2월 서구청에서 계양산성박물관으로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 현재 계양산성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귀부.


중심성이 허물어진 시기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읍성 폐지령’이 발표되면서다. 성은 무너뜨렸지만 비석과 비석을 떠받치고 있던 받침돌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중심성 성문 서쪽으로 20m 아래, 경명현 산자락에 있던 중심성사적비는 1950년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박물관이 불타면서 함께 소실되고 만다. 이제 남은 것은 받침돌 하나. 이 귀중한 받침돌마저 1990년대 후반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 같은 사실이 지역 언론에 보도되며 시끌벅적해지자 관계 당국이 수배에 나서 마침내 어느 석재상에 처박혀 있던 것을 찾아낸다. 그리고 서구청 우측 통로 앞으로 옮겨 놓았다.
지금의 계양산성박물관으로 옮겨진 때는 지난 2월이다. 박물관이 개관 기념 특별전을 진행하던 중 지금의 자리에 옮겨와 관람객들을 만나고 있다.



중심성사적비 받침돌은 지난 2월 서구청에서 계양산성박물관으로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 현재 계양산성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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