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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특집 - 국립세계문자박물관 5월 개관, 정족사고·외규장각을 가다

2023-02-01 2023년 2월호


그 많던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서적은 어디로 갔을까


문자와 인쇄술은 인류의 문명을 획기적으로 뒤바꾼 최고의 발명품이다. 인터넷, 메타버스의 탄생도 제1의 정보혁명인 ‘인쇄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오는 5월 송도국제도시에 문을 연다. 인천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팔만대장경, 정족사고, 외규장각, 한글 점자를 창안한 도시로 2015년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유치했고, 8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됐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사고’와 왕실 서적을 품었던 ‘외규장각’을 찾아갔다.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정족사고


​가장 방대한 왕실 서적을 보관했던 장사각(사진좌)과 선원보각 전경


<조선왕조실록>

가장 많이 보관하던 사고  - 정족사고


“철커덕! 삐이-익”
‘정족사고’의 육중한 자물쇠를 풀고 나무 문을 열자 두 채의 건물이 나타난다. 건물들은 옆으로 길게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왼쪽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인 ‘장사각’이고, 오른쪽은 왕실의 족보를 보관했던 ‘선원보각’이다.
장사각의 문을 여니 두 개의 보관함이 눈에 들어온다. ‘법화경판’ 104점을 보관하고 있는 보물함이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조선왕조실록>은 단 한 권도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선원보각은 아예 텅 비어 있는 모습이다.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는 어디로 간 것일까.
조선은 건국 이후 <조선왕조실록>을 편찬, 춘추관·충주·성주·전주 등 네 곳에 나눠 보관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유일하게 전주사고본만 남는다. 조선은 이러한 연유로 1603년(선조36)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실록을 다시 제작해 춘추관, 강화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등 다섯 곳에 사고를 세워 보관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1659년 강화 유수로 부임한 유심(선조 외손자, 1608~1667)이 1660년 “강화가 외적의 침입을 피하기 적합한 곳”이라며 왕실 세보와 실록 등을 전등사 경내로 옮길 것을 조정에 건의한다.
이러한 연유로 1678년(숙종4) 전주사고의 책들은 정족사고로 옮겨졌으며, 이때 장사각과 선원보각을 지어 <선원세보>를 비롯한 왕실 관계 책들을 보관하기 시작했다.
1707년엔 황흠 강화 유수가 장사각을 고쳐 짓고 별관을 새로 만든다. 전등사는 이때 정족사고를 관리하는 사찰로 공식 지정되며 1734년(영조10) 일종의 정부 지원금인 선두포답의 곡식을 하사받기도 한다.
정족사고가 보관하던 책은 4,000여 책으로 전국 4대 사고 가운데 가장 방대한 양이었다. 그중의 백미는 국보 151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으로 이는 조선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는 470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왕실 서적이다. 정족산본 <조선왕조실록> 1,707권 1,187책은 1910년 강제 한일병합조약과 함께 서울 ‘규장각’으로 옮겨진 이래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장사각 안에는 법화경 104점과 조각품만 전시되어 있다.


선원보각 내부는 빈 창고처럼 보인다.

고려궁지의 수백 년 된 나무 오른편으로 외규장각이 눈에 들어온다.


의궤 등 1,500여 왕실 서적

보관한 보장지처  - 외규장각


“책이 생각보다 크네. 저게 조선 시대 사람들이 만든 거라고?” “응, 진짜는 아니고 모조품이야.”
햇살이 밝은 겨울날, 외규장각 앞에서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셀카’를 찍으려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외규장각 안으로 들어가니 의궤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문과 왕실 행차도 정도만 눈에 띈다. 한편 유리 진열대 안에 책이 있어 들여다보는데, ‘의궤복제품’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외규장각은 ‘외곽에 있는 규장각’이란 뜻으로 ‘규장외곽’이라고도 한다. 1781년(정조5) 규장각 제학이던 서호수를 강화 유수로 임명한 정조 임금은 강화 궁궐의 행궁 동쪽에 외규장각을 짓는다. 정조는 <도서집성> 5,000여 권을 베이징에서 구입해 홍문관 소장본과 강화부 행궁에 보관한 명나라의 책들을 정리하며, 희귀하고 비밀스러운 수천 종의 책을 보관하기 위해 외규장각을 건축했다. 1781년 9월 24일 강화 유수가 된 김익은 1782년 2월 외규장각이 완성됐음을 보고했고, 정조는 “외규장각의 공역이 끝났으니 봉안할 금보, 옥보, 은인, 교명, 죽책, 옥책과 명나라에서 흠사한 서적, 열조에서 봉안했던 서적, 보관돼 전해 오던 서적과 사고에서 이봉한 어제, 어필 등의 서적을 기록해 책자를 만들고 내각, 외각 및 서고에 나누어 보관토록 하라”라고 어명을 내린다.
외규장각은 정간 6칸, 전영 3칸, 동벽문 2칸, 협문 2칸, 정문 2칸, 위장직소 5칸으로 지어졌으며 정조는 1782년 4월 2일부터 외규장각에 서적을 봉안하기 시작해 조선 후기까지 의궤, 어제, 어필, 간본 등을 봉안했다. 당시 강화 내고에 보관하던 책은 경부 7종 45권, 사부 14종 303권, 자부 41종 679권, 집부 47종 516권 등 모두 109종 1,543권에 달했다.
외규장각에 보관하던 서적이 불에 타거나 약탈당한 때는 1866년(고종3)이다. 당시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하며 프랑스 신부 11명을 처형하자 프랑스 함대는 이를 빌미로 강화도를 무력 침공한다. 프랑스군은 이때 양민을 학살하고 외규장각을 불태웠는데, 6,000권 이상의 책이 사라지고 340여 책의 왕실 문서와 은괴 수천 냥도 약탈당했다.

정족사고, 외규장각 도서 반환 요구 목소리
프랑스는 앞서 삼랑성 정족진을 배수진으로 격렬하게 저항하는 조선군에게 대패하자 퇴각하면서 의궤와 자료 359점을 약탈한 뒤 외규장각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의궤는 ‘의식의 궤범’이란 뜻으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의미를 지닌다. 왕실과 국가가 치른 의식과 행사를 준비, 실행에서부터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2010년 프랑스가 보관 중이던 외규장각 의궤 297권은 재불 학자 박병선 박사의 노력으로 고국의 품에 안긴다.
그러나 정작 현재 강화 궁궐 터에 재현해 놓은 외규장각 안엔 의궤 복제품 몇 권만 있을 뿐 단 한 권의 진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지역에서 ‘인천 문화재 반환’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는 이유다.



계묘년 새해, 외규장각 앞에서 한 가족이 셀카를 찍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외규장각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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