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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스케치에 비친 인천 ① 만석동

2021-01-11 2021년 1월호

삶, 공장 품은 부둣가에 스미다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첫 번째는 고제민 작가의 손끝에서 피어난 만석부둣가 동네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임학현 포토디렉 터

만복유통  16×24(cm) pen, watercolor on paper 2020
만석부두 가는 길의 구멍가게.
평범하면서도 아름다운, 한 가족의 70여 년 삶이 흐른다.

공장지대 한복판에, 살다
일곱 남매는 공장지대 한복판에서 나고 자랐다. 인천 판유리 공장, 동양방적(동일방직), 한국기계(두산인프라코어), 대일목재 등 거대한 공장으로 둘러싸인 바닷가. 밤낮으로 꺼지지 않는 불빛을 따라, 전국에서 노동자들이 모여들던 동네다.
“1960~1980년대 대한민국 산업화 시대를 이끌던 역사적 중심지예요. 일과 사람이 넘치던 곳이었지요.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집 앞을 지나 공장으로 출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일곱 남매 중 여섯째, 박상문(60) 명문미디어아트팩 대표(전 인천지속가능발전협의회 상임회장)는 만석부두 일대가 북적이던 시절의 기억이 선명하다. 거대한 공장들을 품은 바닷가에서 태어나 살며 그의 꿈도 자라났다.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들던 제염 공장의 굴뚝은 ‘나만의 첨성대’였고, 유리 공장 타워 탱크는 ‘나만의 우주선’이었다.


아버지의 손때 묻은 낡은 장부. 그의 땀과 젊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만석부두 가는 길에 있는 ‘만복유통’이 그의 가족이 살던 집이자 삶을 일궈내던 일터였다. 1970년대 이곳은 만석동에서 몇 안 되는 쌀가게였다. 빵이며 담배며, 이 일대 구멍가게에 물건을 대주는 도매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첫째, 둘째, 셋째 개 뚝… 그리고 끝 집.’ 북성포구에 미로처럼 이어진 횟집들을 이르던 아버지만의 ‘암호’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손때 묻은 낡은 수첩엔 그의 땀과 젊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아버지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주물 기능공이었다. 이천전기(일진전기)에서 기름때 묻혀가며 묵묵히 번 돈을 가게에 쏟아부었다. 자식들 잘 가르치고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 힘닿는 데까지 일했다. 그러면서도 ‘아들딸들 집 하나씩 사줬으면 좋았으련만, 그걸 못해 미안하다’라고 수첩 한편에 못다 한 말을 털어놓았다. 세상 모든 아버지, 부모의 마음이 그러하리라.


나고 자란 고향집을 지키는  만복유통의 막내아들 박상훈 씨.



삶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1974년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아버지는 퇴직금을 미리 받고 재산을 처분하며 빚을 갚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이 집만큼은 끝까지 지켜냈다. 인천에서 스스로 일군 첫 번째 자산이자, 자식들이 나고 자란 집인 까닭이다. 오늘 이 집을 지키는 건 마지막까지 부모님을 극진히 모신 막내 박상훈(58) 씨다. 그는 17년 전 “일주일만 가게를 봐다오”라는 아버지의 청을 마다할 수 없어 고향집으로 왔다. 그때 부모님의 나이는 이미 70대 후반이었다. 그 작아진 뒷모습이, 결국 그를 이 자리에 머물게 했다.

산업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쉼 없이 움직이던 이곳의 시간은 지금 느리게 흐른다. 사람들이 떠나고 가동을 완전히 멈춘 공장도 있다. 하지만 70년 가까이 나름의 이야기를 지켜온 한 가족의 터전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어린 시절 기억 속 건물 그대로예요. 시간이 흐르면, 이 집도 언젠가 사라지겠지요.” 공간도 기억도 유한하다. 허나 그 시간은 이 공간에 머무른 사람들의 가슴 깊숙이 온기 어린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만복유통 옥상에서 박상문 씨.
1973년 재건축한 건물로 당시 보기 드문 이층집이었다.
이 일대에서 원형을 간직한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다.


만석부두-마을  26×36(cm) watercolor on paper 2016

만석고가교 아래, 실향민 고 이치선이 지은 이층집.
70여 년, 실향민과 부둣가 노동자들에게 구들을 내주었다.


낯선 땅, 어머니의 바다
산도 들도 없이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거대한 공장에 둘러싸인 척박한 동네. 하지만 만석동 사람들에겐 바다가 있다. 그 바다는 고향 떠나 갈 곳 잃은 사람들도 기꺼이 품어주었다.

6·25전쟁 때 북에서 떠밀려 온 사람들은 동구 만석동과 화수동 일대에 터를 잡았다. 만석고가교 밑에서 굴을 파는 김선비(81) 할머니는 아홉 살에 황해도에서 피란 와 열다섯 살에 인천으로 왔다. 생을 구했으니 먹고살아야 했다. 아버지가 부둣가 조선소에서 목선을 만들어 거친 바다, 삶의 최전선으로 떠나보냈다. 그 배에 예닐곱 명이 올라타 서너 시간 노를 저어 섬으로 갔다. 거센 물살을 헤치고 다다른 석화石花 밭에서, 억척스럽게 갯벌에 뒤엉켜 바위에 붙은 굴을 쪼아댔다. 비바람이 불어도 육지로 돌아가지 않고 며칠이고 머물렀다.


굴 직판장 2번 굴막의 김선비 할머니. 만석부둣가엔 자식들 위해 손이 부르트도록  굴을 만져온 어머니의 세월이 흐른다.



고 이치선의 이층집. 오래된 나무 기둥이 긴 시간을 비밀스레 간직하고 있다.


‘굴 직판장’으로 오기 전엔, 지금은 스러지고 없는 만석부둣가 공장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굴막에서 캐 온 굴을 작업했다. 집이라고 할 것도 없이 판자를 대고 거적때기를 깔아 지은 옹색한 움막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가운데서도 굴을 깠다. “배고파서 힘든 것도 모르던 시절이었지. 그래도 이 동네 사람들은 다 극성맞아서 배는 안 곯고 살았어.”
할머니가 투박한 손길로 칼질을 할 때마다 탐스러운 굴이 맨살을 드러내며 양동이에 척척 담긴다. 평생 물이 마를 날 없던 손은 갈라지고 터지다 이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고향 떠나 줄곧 바다 곁을 떠난 적이 없으니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으랴. 나이 든 어머니는 오늘도 단단한 석화 속에서 뽀얗게 영근 삶의 희망을 캔다. “생이 끝날 때까지 해야지. 이 일은 없어지지 않아.”


만석부두 선박수리소  24×32(cm) pen on paper 2020



만석동 바다는 배의 일생까지도 넉넉히 품어준다.

공장지대를 깊숙이 파고들어 만나는 후미진 바닷가.

그 안에선 선박이 새 숨을 트기도, 생을 다한 배가 마지막 지친 몸을 뉘기도 한다.

때론 더 큰 바다로 항해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고 아픈 몸을 치유한다.


만석동 바다는 배의 일생까지도 넉넉히 품어준다. 공장지대를 깊숙이 파고들어 만나는 후미진 바닷가. 그 안에선 선박이 새 숨을 트기도, 생을 다한 배가 마지막 지친 몸을 뉘기도 한다. 때론 더 큰 바다로 항해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고 아픈 몸을 치유한다.
여기는 인천 판유리 공장 부지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대한 조선소’. 배를 새로 짓지는 못해도, 여객선이든 화물선이든 고장 난 그 어떤 배도 척척 수리해 낸다. 신재이(66) 씨는 만석부두에 한창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지던 1970년대에 선박 수리 일을 시작했다. 원래 금형 기술자였다, 친구가 기계에 손을 잃는 것을 보고 잠시 다른 일에 손댄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1980년대까지도 만석동 일대의 선박 수리업은 전성기를 누렸다. 배를 열 척, 스무 척씩 독dock에 얹히고 기술자 40~50명이 달려들어 고치고 매만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는 다시 채워지지 않았다.




‘대한 조선소’의 신재이(66) 선박 수리공.
만석동 일대 선박 수리업이 전성기를 누리던 1970년대부터 배를 고치고 매만져왔다.


“사정이 전성기 때나 대형 조선소만은 못해도 ‘참, 잘 살고 있다’ 싶어요. 양복 걸치고 넥타이 매고 일하던 친구들은 다 정년퇴직했는데, 나는 여태 내 힘으로 버티고 있으니까요.” 그의 말에서 평생 먹고살게 한 일터와 기술에 대한 고마움과 자부심이 묻어난다.


육지로는 꿈을 찾아 전국에서 온 노동자를, 바다로는 고향 잃은 사람들을 품어 안았던 동네. 그 품에서 땀 흘려 움직이는 만큼 아름다운,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사람들. 바다와 땅, 깊은 시간과 오래된 삶이 씨실과 날실로 엮이듯 한 폭의 풍경화로 펼쳐진다.




그림 고제민
고제민은 스스로를 ‘인천 작가’라고 말한다. 그에게 인천은 언제든 따듯하게 품어주는 어머니의 품이자, 창작
욕구를 쏟아붓게 만드는 또 다른 자아이며, 힘겨운 삶을 버텨낸 사람들의 한숨으로 이루어진 검푸른 풍경이다.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로 <인천, 그리다>, <엄마가 된 바다>, <인천 담다> 등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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