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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영승의 시선(詩선)

2021-03-30 2021년 4월호

중국인 거리

우리집 앞을 지나는 길은 언덕으로 이어져 있고 언덕이 시작되는 첫째집은 거의 우리집과 이웃해 있었다. 그러나 넓은 벽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창문이나 출입문이라고 볼 수 있는 문들은 모두 나무덧문이 완강하게 닫혀져 있어 필시 빈집이거나 창고이리라는 느낌이 짙었다.
큰 덩지에 비해 지붕의 물매가 싸고 용마루가 밭아서 이상하게 눈에 설고 불균형해 뵈는 양식의 집들이었다. 그 집들은 일종의 적의로 냉담하고 무관심하게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언덕을 넘어 선창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에도 불구하고 언덕은 섬처럼 멀리 외따로 있었으며 갑각류의 동물처럼 입을 다문 집들은 초라하게, 그러나 대개의 오래된 건물들이 그러하듯 역사와 남겨지지 않은 기록의 추측으로, 상상의 여백으로 다소 비장하게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오정희(吳貞姬 : 1947-  )



1987년 인천차이나타운 전경 ⓒ사진 김보섭


어릴 적 우리는 그곳을 짱깨촌이라고 불렀다.
어릴 적의 그곳은 을씨년스럽다 못해 무서워 그곳의 어느 코스를 돌아오는 시합을 하기도 했었는데 물론 내가 늘 일등이었다. 깡다구 시합이었던 것이다. 물론 미리 정해 놓은 그 코스는 양심에 맡겼다. 그 근처 일본식 적산가옥과 함께 그 경계를 넘어서면 그 깊은 밤의 그 짱깨촌은 그야말로 짱깨 한 마리 없는 적막강산, 귀신조차도 없는 무간지옥이었기에, 나 홀로 당당히 귀신일 수 있어 기뻤다. 중학교 때까지는 귀신인가 싶어 바라보면 아편에 취한 반라의 여인이어서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간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우리 학교 너머 화교학교 친구들과 쮸쮸바 내기 농구시합을 하기도 했었다.
“전쟁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는 치열했던 함포 사격에도 제 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것은 중국인 거리라고 불리우는, 언덕 위의 이층집들과 우리 동네 낡은 적산 가옥들뿐이었다.”(오정희, <중국인 거리> 본문 중에서)
몇 년 전 연말 그 차이나타운의 대창반점을 간 적이 있었는데 주인이 유순화(劉順華) 씨라 혹시 유문화(劉文華) 씨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턱 끝으로 바로 길 건너 중국음식점을 가리켰다. 자기 동생이란다. 유문화 씨는 중학교 때 내가 형이라고 부르던 중국인이다. 나는 아직 그 형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글 김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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