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문화

옴니버스 소설 -아무도 울지 않는 밤

2022-08-01 2022년 8월호

한여름 밤의 선택

글 안보윤

동현은 편의점 테이블에 뜨거운 물을 부은 컵라면을 올려놓았다. 오후 8시가 넘어서야 퇴근한 탓에 몸이 무거웠다. 가장 먼 곳의 하늘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이던 노을은 이제 흔적도 없었다. 느슨한 간격으로 세워진 가로등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공에 매달린 노란 불빛은 그리 환하지 않았으나 아늑하고 둥글었다. 동현이 거리 끝까지 이어지는 노란 빛을 눈으로 좇았다. 무릎 아래로 무겁고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피곤할수록 구색을 맞춰 먹어야지.”
말소리와 함께 봉지 김치와 구운 계란이 동현 앞에 놓였다. 동현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자 영석이 얼른 손짓해 만류했다. 어제가 말복이었으니 이 정도는 먹어둬. 영석이 포장된 계란을 톡톡 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영석, 그러니까 박영석 차장은 동현의 회사 상사였다. 사무적인 얘기와 약간의 안부를 주고받는 정도였던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진 건 지난봄부터였다. 편의점 고양이 만두에게 닭 가슴살을 먹이고 있던 동현에게 영석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고양이가 그렇게 매력적인 생물인가? 우리 민서도 이놈한테 푹 빠졌던데 말이야.” 영석은 딸이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에 맞춰 편의점 앞을 서성였다. 동현과 마주치면 차가운 생수나 맥주 같은 걸 건네곤 했다. 한동네 사람끼리,라고 영석은 말했으나 동현은 그 말에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북쪽 언덕 꼭대기에 얼기설기 지어진 낡은 건물에 살고 있는 자신과 인공 폭포가 위치한 정원과 입주민 전용 헬스장, 물놀이 놀이터까지 갖춘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영석이 한동네 주민처럼은 느껴지지 않는 탓이었다.

“열심히 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 같은데 오 년 전과 지금의 제 일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저는 평생, 저런 집에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동현이 로고가 환히 빛나고 있는 아파트 단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감 없이 속엣말이 튀어나온 건 맥주 때문이었다. 영석은 딸이 특별보충수업으로 두 시간 늦어진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편의점으로 들어가 맥주 여섯 캔과 감자칩을 사 왔다. 동현이 하소연하듯 떠드는 말들을 잠자코 들어주던 영석이 입을 열었다.
“우리 어머니가 절에 가는 걸 참 좋아하셔.”
고양이용 육포를 잘게 찢어 만두의 밥그릇에 넣어준 영석은 딱히 불자도 아니신데 말이야, 하고 덧붙였다.
“강화도 보문사라고, 어머니가 소원 빌러 다니는 절이 하나 있어. 나 군대 갔을 때, 취직 준비할 때, 우리 민서 태어났을 때 꼬박꼬박 거기 가서 기도하셨지. 민서 생일 때는 꼭 온 가족을 끌고 절에 가신단 말이야. 나도 아내도 기독교인이라 그냥 나들이한다 생각하고 따라가지. 거기 석굴사원이 참 멋지거든.”
육포를 다 먹은 만두가 테이블 위로 뛰어올랐다. 통통한 몸집 때문에 테이블이 기우뚱 기우는 걸 동현이 얼른 잡았다.
“그 절에 소원 계단이란 게 있어. 산 중턱 바위에 새겨진 부처를 보러 가는 길인데 가파른 계단 옆에 소원등이 빼곡히 달려 있지. 등 아래 붙은 소원지에는 온갖 문구가 다 있어. 대학합격, 사업번창, 자녀축복, 만사형통, 로또당첨. 사람들 소원을 읽으면서 가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거든.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다들 한결같이 필사적이구나. 다들 한결같이, 뭘 원하기만 하는구나.”
영석이 목을 길게 빼고 길 반대편을 살폈다. 둥글고 노란 빛이 민서가 지나와야 할 길을 따라 반짝거렸다.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놓인 것들의 냄새를 맡던 만두가 흥미를 잃었는지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몸집에 비해 가볍고 날랜 움직임이었다.
“바라는 건 다들 똑같아. 좋은 직장과 좋은 집, 많은 돈과 완벽한 건강, 사업은 번창해야 하고 아이들은 똑똑해야 돼. 그게 이루어지면 소원 빌기가 사라질까? 아니야, 그다음엔 더 좋은 직장과 더 좋은 집, 더 더 많은 돈을 위해 또 맹렬히 소원을 빌지. 나는 그게 참 이상하더라고.”
길 끝에서 자그마한 인영이 나타났다. 영석을 발견했는지 민서가 양팔을 위로 쭉 뻗어 크게 흔들었다.
“왜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세계가 아닌, 가지지 못한 세계에 묶여 살아갈까.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은 돌아볼 생각도 않고 갖고 싶은 것에만 집착하면서 매 순간 불행에 빠질까.”

만두 얼굴이 더 커진 것 같아. 민서가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영석이 웃음을 참는 동안 민서는 만두의 양 뺨을 찹쌀떡 다루듯 길게 늘였다 놓았다. 불만스럽게 꼬리를 내리치면서도 만두는 민서가 하는 대로 얼굴을 내어주고 있었다.
“아빠, 그거 알아? 고양이는 얼굴이 클수록 미남이래. 그러니까 만두는 왕미남 고양이야.”
“그래?”
“가끔 만두 얼굴이 너무 커서 불쌍하다고 그러는 애들이 있거든. 걔들이 뭘 몰라서 그래. 만두는 얼굴이 커서 잘생긴 완벽한 고양이야.”
민서가 아이스크림을 고르러 편의점에 들어간 사이 영석은 동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네가 알고 있는 김동현은 낡고 좁은 집에 살고 있는, 오 년간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거무죽죽한 사람인 모양인데 말이야. 내가 알고 있는 김동현은 달라.”
만두가 동현의 다리에 몸을 붙여왔다. 민서가 잔뜩 주무른 통에 더 커다래진 것 같은 얼굴을 동현에게 문질러대기도 했다. 여유를 되찾은 꼬리가 한가롭게 움직이는 걸 동현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아는 김동현은 오 년간 자신의 일상을 흔들림 없이 지켜낸 사람이야. 부지런하고 매일 노력하는 사람이라 하반기에 있을 메인 프로젝트에 제일 먼저 발탁된 사람이지. 어느 쪽 김동현으로 살아갈지는 자네에게 달렸어.”
민서가 편의점에서 나오자 영석이 큰 보폭으로 걸어 민서 옆에 섰다. 얼굴이 커서 불쌍한 고양이와 얼굴이 커서 미남인 고양이. 영석은 그렇게 말해놓고 손을 흔들었다. 가로등의 노란 불빛을 따라 민서와 나란히 걷는 영석의 뒷모습은 회사에서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 동현은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만두를 쓰다듬었다. 크고 못생긴 고양이었으나 다정하고 인내심 강한 고양이기도 한 만두의 얼굴을 오래오래. (*)

안보윤 | 1981년 인천 출신. 2005년 장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로 문학동네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자음과모음문학상 수상. 소설집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소년7의 고백>, 장편소설 <오즈의 닥터> <사소한 문제들> <우선멈춤> <모르는 척> <밤의 행방>, 중편소설 <알마의 숲>이 있다.



첨부파일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홍보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4
  • 최종업데이트 2024-01-10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