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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1930년대, 감각적인 인천의 풍광

2003-06-11 2003년 6월호

나혜석(晶月 羅惠錫 1896∼1948)은 수원에서 출생하여 1913년 진명여고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한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다. 남녀 통틀어서도 1910년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한 고희동, 1911년 같은 학교에 입학한 김관호, 그리고 그 이듬해 입학한 김찬영에 이어 네 번째가 된다.
그녀는 김활란, 김마리아, 박인덕 등과 1919년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죄목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6개월 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鮮展)가 개최되자 1회전부터 11회전까지 꾸준히 출품, 20점 가까운 작품이 입선(특선 및 입상작 포함) 함으로써 여류화가 중 선전에서 가장 뚜렷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여관운동가이자 자유 연애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녀는 35세이던 1931년 외교관 남편 김우영과 이혼하고 파멸로 치닫게 된다. 1948년 서울시립자제병원 무연고자 병실에서 소지품 하나없이 병사,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갔다.
이 그림은 나헤석이 파리에서 귀국한 후 그곳에서 최린과의 치정으로 남편과 이혼하고 작업에만 몰두하던 1930년대 중반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그녀는 전국을 유랑하며 그림을 그렸다. 서둘러 그렸음인지 정치(精緻)한 맛은 떨어지나 팔작지붕의 한옥, 왜소한 초가, 그리고 서양식 건물이 어우러져 있는 근대화된 도시, 인천의 당시 풍광을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경모 (인천대학교 미술학과 겸임교수 / 미술평론가)


합판에 유채, 15×22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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