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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인천의 아침-수인선

2020-09-01 2020년 9월호

수인선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2020년 8월, 새로운 소래철교 위를 달리는 수인선

침목 사이로 내려다본 갯벌은 아찔했다. 회오리를 돌며 거칠게 흐르는 바닷물은 시커먼 블랙홀처럼 보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한두 발짝 내디뎠던 발걸음을 접고 뒷걸음질을 쳤다. 녀석과의 ‘누구 간이 더 큰가’ 게임은 1분도 안 돼 끝났다. 술기운이긴 했지만 녀석은 성큼성큼 다리를 잘도 건넜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협궤열차가 지나던 ‘소래철교’는 걸어서도 건널 수 있는 다리였다. 하루 세 번 수인선이 지나는 시간을 피해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다녔다. 곤쟁이젓갈, 고년조개젓갈 광주리를 머리에 인 여인들, 소금을 어깨에 짊어진 염부들이 소래철교를 건너는 모습은 위태로웠다. 6·25전쟁 시기 소래철교를 건너던 피란민들이 많이 빠져 죽기도 했다.
소래철교의 주인은 ‘수인선’이었다. 협궤 열차, 꼬마 열차라 불린 수인선의 철로 폭은 일반 철로의 반 토막에 불과했다. 열차 크기가 작고 2량~3량만이 붙어 운행했다. 군데군데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앉으면 무릎을 펴기가 어려웠고, 불콰해진 사내들의 막걸리 냄새가 풍겨오기 일쑤였다. 새우젓, 생선 냄새가 진동하고 개똥참외가 굴러다녔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수인역에 서는 장터에 내다 팔 것들이었지만, 열차 안 즉석 흥정이 이뤄지기도 했다.
누군가에겐 동화의 세계로 기억되기도 했다. 8년 전 만난 소래 출신 연극인 박정자 씨는 “열차가 덜컹거리며 소래철교 위를 천천히 지나갈 때면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버스운전사처럼 바로 내 앞에 앉아 운전하는 기관사 아저씨도 정겨웠고, 열차 창문을 가리는 빛바랜 분홍빛 커튼의 실루엣도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 용현동 똥고개를 넘지 못해 낑낑대면 학생들이 뛰어내려 뒤에서 밀었다느니, 버스와 부딪혀 뒤로 나동그라졌다느니 긴가민가한 일화도 전해온다.
수인선은 인천에 사는 일본인들이 경기 내륙까지 상권을 확장하기 위해 건설한 철도이다. 조선의 소금과 쌀에 군침을 흘리던 일본은 수인선 건설 뒤 소래와 남동, 군자에서 생산한 소금을 한 톨 남김없이 인천항으로 실어 날랐다. 경기도에서 생산한 쌀을 수송하기 위해 건설한 수려선(수원~여주)을 인천항으로 연결하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광복 이후 이용률과 승객이 급감하면서 1995년 12월 31일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폐선된 지 25년 만에 수인선이 재개통한다. 오는 9월 12일 52.8km 전 구간 첫 운행에 들어가는 것이다. 인천~구로~수원 간 지하철로 90분 걸리던 시간이 55분으로 35분이나 단축된다. 2012년부터 단계적 개통을 시작한 수인선은 사업비만 2조74억원이 투입된 대역사이다.
1937년 아픈 시대에 태어나 광복 이후엔 낭만과 추억으로 달리던 수인선. 좁은 선로를 덜컹덜컹 뒤뚱거리며 달리던 꼬마 열차는 바야흐로 좋은 시대,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해 다시 미래를 향해 질주할 것이다. 최신형 고속전동차가 되어, 인천의 미래처럼 쭉쭉 뻗은 선로 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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