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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인천의 아침-칼럼

2021-06-01 2021년 6월호


조미전쟁 150주년, 수자기 펄럭이다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조미전쟁이 벌어졌던 광성보. 가운데 帥자가 써 있는 깃발이 수자기다.
사진은 2010년 10월 재현한 광성보 전투 장면

강화도 ‘광성보’에 가면 장엄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는다. 어재연(1823~1871) 장군의 풍모가 느껴지는 정문 안해루,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군인들의 무덤인 신미순의총, 치열한 백병전이 펼쳐졌던 손돌목돈대. 그곳에 서서 바다를 보노라면 150년 전 ‘조미전쟁’(신미양요)의 처절한 전투 장면이 염하처럼 빠르게 흘러간다.
1871년 6월 11일 미군 함대는 광성보를 향해 무차별 함포 사격을 가한다. 광성보엔 당시 진무중군 어재연 장군과 수비병 600여 명이 배수진을 치고 있었다. 제대로 된 현대식 총 한 자루 없는 상황에서 어재연 장군은 동생 어재순, 조선군과 함께 목숨을 내놓고 전투에 임한다. 결과는 참혹했다. 미국이 전사자 3명, 부상자가 10명인 반면 조선군 전사자는 350명, 부상자는 20명에 달했다. 광성보를 점거한 미군은 이때 조선군이 하늘 높이 들고 싸우던 어재연 장군기인 수자기帥字旗를 강탈한다.
조미전쟁은 미국이 조선을 개항시킬 목적으로 침략했으나, 조선군의 격렬한 저항에 밀려난 사건이다. 조선으로선 ‘졌지만 승리한 전쟁’으로 평가된다. 당시 미국은 일본 등을 상대로 ‘포함외교’를 벌여 성공했지만 유일하게 조선에서만 실패하고 철수해야 했던 것이다. 참전자 슬라이Schley 해군 소령은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장렬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 죽었다.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는 기록을 남겼다. 당시 조선군을 높이 평가한 미군은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장교들을 정중히 매장해 주었다고 전한다. 
미국이 다시 조선 땅을 밟은 때는 1882년이다. 이번엔 함포 대신 성조기를 들고 인천 땅을 밟았다. 그 해 5월 22일 조선 전권대신 신헌과 미국 전권공사 슈펠트Shufeldt 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서구 열강과 최초로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치외법권과 최혜국대우를 인정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협상 장소는 자유공원 초입 언덕이었고 이때 우리나라 태극기가 처음으로 만들어져 사용되기도 했다.
미국이 탈취한 이래 아나폴리스Annapolis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던 수자기가 고국으로 귀환한 때는 2007년이다. 문화재청은 이때 미국으로부터 장기 임대하는 형식으로 수자기를 가져왔는데 2022년 10월이면 임대 기간이 끝난다. 가로 4.13m, 세로 4.30m 크기의 삼베로 제작한 수자기는 현재 강화역사박물관이 보관 중이며 강화전쟁박물관에선 복제품을 전시 중이다.
미국이 약탈해 간 문화재인 수자기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용맹하게 싸워 마침내 적을 쫓아낸 불굴의 상징이자, 귀중한 우리 문화유산이다. 조불전쟁(병인양요, 1866)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갔다가 반환한 외규장각 의궤와 마찬가지로 수자기도 어떤 형식으로든 돌려받는 것이 옳다. 호국의 달인 6월. 손돌목에 서서 불어오는 염하의 바람을 맞는다. 지그시 눈을 감자, 푸른 하늘 드높이 수자기가 펄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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