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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시민 시장

2021-09-01 2021년 9월호


소래염전에선 여전히 소금꽃이 핀다
소래염전 염부 김대봉


전통 천일염의 명맥을 잇는다는 소명으로 일하다 보니‘염전 맥가이버’란 별명이 붙었어요.


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갯벌 따라 불어온 바람이 잔잔한 해수를 깨운다. 따스한 햇살이 염전을 달군다. 기다림 끝, 소금꽃이 피기 시작하면 이제 염부 차례다. 염부가 소금을 쓱쓱 긁어모은다. 굵은 땀방울을 뚝뚝 쏟으면서도 새하얀 소금이 쌓여갈수록 눈에서 생기가 돈다.
도심 한가운데 다른 세상 같은 소래염전에서는 여전히 옛 방식으로 소금을 거둔다. 그 밭 한가운데 염부 김대봉(72) 씨가 서 있다. 김 씨는 4년 차 염부지만 소금에 대한 애정만큼은 40년 차 장인 못지않다. 사라져가는 전통 천일염의 명맥을 이어간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첫해에는 주경야독하며 일을 배우느라 몸무게가 5kg이나 줄기도 했다.
“2년 차부터 하루도 안 빼고 일지를 썼어요. 전통 천일염 방식을 기록해 두었지요.” 일지에는 소래염전의 날씨와 결정 상태, 생산량, 시설 보수 내용 등이 빠짐없이 적혀 있다. 물꼬 망치 같은 전통 도구도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타고난 눈썰미와 손재주 덕분에 목수가 하는 배수로 공사에도 일손을 보태 동료들은 그를 ‘염전 맥가이버’라고 부른다.
어릴 때 갯벌에서 나고 자란 그는 염전 일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안산시 대부남동 782번지. 어린 시절, 시골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안가에 천일염전 대여섯 곳이 운영되고 있었다. 1950~1960년대 염전은 동네 아이들에겐 놀이터였다. “발가벗고 수영하고, 물 퍼 올리는 수차에 올라가 놀다가 염부 아저씨한테 혼쭐이 나기도 했죠.”
열아홉에 입대해 34년간 직업 군인으로 복무 할 때도, 스물일곱에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도 가슴 한편엔 언제나 사라진 갯벌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퇴직 후 서창동에 집을 마련하고 아내 전화자(69) 씨와 자주 소래습지생태공원을 찾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우연히 시에서 염부를 뽑는단 소식을 듣고, 응시해 합격했어요.” 갯벌이 그를 불러준 것만 같았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염전 일은 생각보다 고됐다. 매일 4만㎡에 달하는 염전을 빠짐없이 돌아보며 물꼬를 터주고, 바닷물을 머금은 소금을 수레에 실어 날라야 해 쉴 틈이 없다. 가족들이 걱정의 눈길로 바라보지만 건강한 몸으로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할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 없다.
해가 갈수록 동료들에 대한 애틋함과 고마움도 커진다. 소래염전에선 요즘 김 씨를 포함해 4명의 염부가 하루에 400kg~1,000kg의 소금을 수확한다. 함께 구슬땀을 흘리고, 갑자기 소나기라도 오면 해주(지붕이 있는 저장소)에 소금물을 가두는 작업을 일사천리로 해낸다.
그가, 모은 소금을 손수레에 담아 소금창고로 실어 나르느라 분주하다. 염전에서 거둬들인 소금은 바닷물을 머금고 있어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1년 이상 더 건조해야 한다. 낙엽송과 소나무로 지어진 창고에서 바닷물을 빼면 씁쓸한 맛이 빠지며 달짝지근 맛있는 천일염이 탄생한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소래염전에서 일하고 싶어요.” 소금밭을 일구느라 까맣게 그을린 그의 얼굴에서 소금꽃 같은 환한 웃음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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