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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내가 사랑하는 인천-언론인 신용석

2020-05-03 2020년 5월호

파리 특파원 시절에도 고향 인천 잊은 적 없어
글 신용석


파리 특파원 시절 개선문 앞에서

파리 특파원 시절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단독 회견

선친(신태범 박사, 1912~2001)께서 다섯 살 되던 해에 조부님(신순성 광제호 함장, 1878~1944)을 따라 인천에 정착하시면서 나는 숙명적으로 인천 사람이 되었다. 몇 차례 서울이나 프랑스에 정착할 갈림길에 놓이기도 했으나 선대의 인천에 대한 애착과 사랑의 영향으로 줄곧 인천에서 살게 되었다.


인천이 서울 부근의 도시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은 광복 직후 답동성당에 있던 박문유치원을 다니고 있을 때이다. 어머님(이성자 화백, 1918~2009)을 따라 기차로 서울 구경을 다녀오면서 “이제 인천 갈 시간이 되었다”는 말씀을 듣고 우리 집이 인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창영초등학교와 인천중학교에 다니면서 인천이라는 도시가 광복 이전에는 배다리 철교를 경계로 일본인촌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던 지역으로 양분되어 있다는 것과 크고 작은 배들이 드나드는 항구도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서울로 다니고 직장도 서울에 있었으나 대학 졸업 후 조선일보 프랑스 주재 특파원 시절을 제외하고는 줄곧 인천을 떠나지 않았다.


선친께서는 외과 의사로 신포동에 ‘신외과’를 개업하고 계셨는데 입원 환자들이 많았고 한밤중에도 병원 문을 두드리며 ‘신 박사’를 찾는 응급 환자들 때문에 한시도 인천을 떠날 수 없었다. 광복 직후 선친께서는 미군이 처음 인천에 상륙했을 때 조부께서 일제강점기 동안 비밀리에 간직하셨던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 광제호의 대형 태극기를 들고 나가서 영어로 환영 인사를 했다고 하셨다. 일본식 동명洞名을 우리나라 이름으로 바꾸는 일을 맡으셔서 중국인들의 동네 지나정支那町을 한국인들과도 사이좋게 지내라는 뜻을 담아 선린동善隣洞으로 바꾸고, 대한제국 시절 화폐를 만들던 전환국이 있던 곳을 전동錢洞으로 개명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동기에 다방면으로 활동하셨음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더구나 초등학교 재학 시절 조부님께서 광제호로 입항할 때 축항으로 가서 갑판 위에 서 계시던 조부님께 큰절을 올리셨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는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들이 인천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얽혀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고향을 떠나야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고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고향에 대한 향수가 애착으로 승화된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프랑스 특파원으로 일할 때였다. 중학생 때부터 시작한 우표 수집 취미로 파리에서도 틈나는 대로 우표상을 찾았는데 어느 날 인천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엽서를 발견하고 이후 프랑스를 비롯해 독일과 영국 그리고 미국에서 인천의 풍광이 담긴 사진엽서를 본격적으로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인천에서 처음으로 ‘옛 사진엽서를 통해 본 개화기 인천의 모습과 우리의 풍습’이라는 전시회가 새얼문화재단 주최로 열렸다. 많은 시민들이 전시회를 관람했고 향토사학자이자 시립박물관장을 지낸 조우성 씨도 보러 왔다. 인천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조우성 씨와는 그 후 인천향토사연구회를 만들어 사진엽서 전시회를 격년으로 개최하면서 인천 향토사 연구에 서로 교류하며 지낸다. 인천에서 ‘몸소 겪고 들은 이야기들’을 신문에 연재 후 <인천 한세기>라는 책자로 펴내신 선친께서는 사진엽서전에 나오는 건물들과 길거리에 대해서 전문가적인 설명과 해설을 곁들여주셨다. 조부님에 이어서 3대째 인천에 살면서 인천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공유하게 되어 마음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선친께서 외과 의사 가운을 벗고 사시던 자유공원 인근 송학로에서 계속 살면서 초등학교 시절 오르내리던 홍예문 계단이나 선생님을 따라 소풍을 갔던 월미도를 걷다 보면 어린 시절의 회상과 함께 귀소본능을 실천하고 있다는 보람 때문인지 마음이 편해진다.


우리 고장 인천은 개항을 통해서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기여했고 6·25전쟁 때 상륙작전으로 나라를 구해낸 도시이기도 하다. 인천 사람이라는 데 자부심과 사명을 지니고 평생 살아오면서 선친의 책상머리에 붙어 있던 미국 시인 에머슨의 글귀를 자주 되새긴다.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송학동 자택에서 선친 신태범 박사와 함께

필자의 저서들


언론인 신용석은 할아버지 신순성 함장, 아버지 신태범 박사에 이어 인천에 뿌리내려 살고 있다.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과 2014 인천아시안게임 유치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제3대 인천개항박물관 명예관장으로 인천 역사문화연구와 보존에 힘쓰고 있다.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 랠프 월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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