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시정

인천의 아침 칼럼

2021-06-29 2021년 7월호

지나온 40년, 가야 할 40년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



하늘에서 본 인천 도심과 인천신항

인천시가 1981년 7월 1일 경기도에서 독립해 직할시가 되기 직전, 어머니가 계양구 효성동에 집을 지었다. 남편을 일찍 여읜 어머니는 밥솥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서울의 친정집에 중학생 아들을 맡긴 채 부평 지역의 공장을 전전하며 집 한 칸을 겨우 마련한 것이었다. 방학 때만 만날 수 있었던 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한 때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980년대 중반이다. 당시 효성동이 속한 북구는 부평공단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공장과 다가구주택들로 넘쳐났다. 


인천이 광역시로 승격하기 전인 1990년대 초반 신문사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부평과 인천을 구분하던 간석동을 넘어 출퇴근하며, 사람들을 만나 밥 먹고 술 마시는 장소도 부평역 일대에서 신포동을 중심으로 한 중구 지역으로 바뀌었다. 똥마당(북성포구)과 화수부두에서 우럭·광어를 먹고, 만석고가교 아래서 주꾸미를 맛보며 인천의 맛을 알게 됐다. 부두를 따라 지어진 빨간 벽돌 창고와 한 세기를 넘긴 근대 건축물들, 자유공원에 올라 바라보는 인천항의 크고 작은 배들은 인천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모티브로 다가왔다.
사회부 기자로 일선 경찰서를 취재하던 1995년 인천이 광역시가 되며 북구는 부평구와 계양구로 나누어졌고, 남구에서 연수구가 분리됐다. 그해 강화도와 김포군 검단면이 인천광역시로 들어오며 인천의 외형은 커졌고 내치는 더 단단해져 갔다. 천둥벌거숭이 같던 30대 시절엔 인천전철과 인천국제공항이 각각 개통·개항했고 전국 최초로 송도·영종·청라 경제자유구역이 탄생했다. 막 살면 안 되겠다고 자각하기 시작한 40대 시기, 인천 인구는 300만을 넘었고 인천대교가 놓였다. 지난 40년 간 인천의 성장은 개인의 삶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좋은 도시 인천엔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인천 독립 40년’인 2021년, 50대 중반의 나이가 되면서 지금까지의 평탄하고 행복한 삶은 인천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 덕임을 깨달았다. 인천이란 도시는 미미했던 한 개인을 ‘인천짠물’로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인천을 사랑하는 ‘인천주의자’가 된 것도 알게 되었다.
인천 시민들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건 대대로 이 땅을 지키며 살아온 시민들과 좋은 인천을 설계한 ‘뜻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인천의 현인들이 그랬듯이 ‘민선 7기 인천시정부’는 지금 40년 앞을 내다보며 ‘희망과 도약’의 지속 가능한 인천을 설계하는 중이다. 민선 7기는 오래도록 방치했던 해묵은 난제들을 하나 둘 풀어내며 쉼 없이 걸어왔다. 수도권매립지 2025년 종료 선언, 배다리산업도로 협의 등 10여 개의 주요 현안은 누군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뜨거운 감자’였다. 민선 7기는 그것들을 결단력 있게 움켜쥐었다. 쉽지 않았으나, 진정으로 시민들을 위한 길이 무엇인가를 심사숙고한 결과였다. 전국 6대 광역시 중 가장 높은 재정자립도(56.1%)를 이끌어내고, 공약 이행률이 98%에 이를 정도로 많은 문제를 해결했지만, 여전히 몇몇 현안은 진행형이다. ‘살고 싶은 도시, 함께 만드는 인천’의 ‘미래 40년 인천 설계’에 인천 사람들 모두가 동참해 벽돌 한 장씩을 쌓았으면 좋겠다.



첨부파일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홍보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4
  • 최종업데이트 2024-01-10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