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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장 ‘덕수들’ 이야기

2015-06-02 2015년 6월호


중앙시장 ‘덕수들’ 이야기

<영화 ‘국제시장’ 주인공>



 

interview
양키시장에서 수입물건 팔며 삶을 이어가다
홍성녀 할머니1932년생, 황해도 연백




양키시장의 좁다란 골목을 미로처럼 돌다보면 수입과자, 화장품, 통조림 등을 파는 ‘은정이네’ 가 나온다. 1평 남짓한 공간은 물건을 쌓아놓은 공간을 제외하면 한 사람이 누우면 딱 맞는다. 홍성녀 할머니(83)는 40년을 넘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할머니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이다. 6.25 전쟁이 나자 처녀들을 청년단원으로 만들려는 인민군들을 피해 밤중에 몰래 바닷길을 통해 아버지, 외삼촌과 피란을 나왔다. 처음엔 황해도 연백과 가까운 용매도에서 몇 달을 지냈다. 당시 할머니의 나이가 꽃다운 18세였고,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교장을 지낸 지식인이었다. 전쟁이 길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어머니, 동생들은 피란을 같이 나오지 않았다. 용매도로 피란 온 후 삼촌과 고향에 몰래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는 그때 어머니를 만났다면 그냥 그곳에서 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할머니는 용매도에서 머구리배를 타고 다시 여수로 갔고, 다음해에 트럭을 타고 인천으로 올라 온 후 피란민이 많았던 만석동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오는 원조물자를 분배하는 반장 일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남편과는 친척의 중매로 만났다. 고향은 개성이었다. 얌전하고 온순한, 샌님 같은 양반이었다. 신혼은 송림동 남편의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남편은 25년 전인 1990년에 암으로 숨졌다. 어려운 시절 빈속에 먹은 독한 약들 때문에 위가 헐었고 그것이 암이 되었다.
할머니가 양키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 것을 둘째를 낳은 후였다. 중앙시장에서 장사하는 친척의 소개로 노점에서 시작해 돈을 모아 가게를 얻었다. 당시 돈 100만의 거금을 투자했다. 형편이 어려워 1층에서 장사를 하고 2층에서 살림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할머니는 1남 4녀를 두었다. 처음 시작할 때 두 곳이었던 수입물건 파는 가게는 장사가 잘 되면서 3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젊을 때는 PX 물건을 대주는 아줌마들이 오면 물건을 싸게 많이 확보하려고 아줌마들끼리 옥신각신도 많이 했다.
형편이 좋아진 뒤로는 송현동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동네는 물이 하루 건너 나왔다. 젖먹이부터 큰 애까지 아이가 많아 항상 일이 산더미였다. 막내 기저귀를 빨면서 한번 쓰고 버리는 기저귀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쉼 없이 일해야 하는 고달픈 삶이었다.
가게 이름 ‘은정이네’는 막내딸의 이름이다. 83세의 할머니는 논현동에서 동인천까지 매일 지하철과 버스로 출퇴근한다. 첫째, 셋째 일요일만 쉬며 아침 10시에 문을 열고 저녁 8시에 퇴근한다. 장사하며 자식 잘 키운게 큰 자랑거리다. 아직은 건강에 큰 무리가 없어 꿋꿋하게 가게를 지키고 있다.  



interview
신성일’ 닮았던 청년, 양복장이로 미싱을 돌리다
조병헌 할아버지1924년생, 황해도 연백




미림극장에서 (구)지하상가(굴다리)로 가는 길 옆 상가 1층에는 양복점이 여럿 눈에 띈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양복점과는 거리가 멀지만, 상점의 모습만으로도 오랜 연조를 느끼게 한다. 한때는 양복 입은 멋쟁이들이 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을 것이다. 이 양복점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얼굴로 동네사람들의 옷을 수선하고 짜깁기하고 있는 평화양복점. 이 작은 양복점이 6.25 전쟁으로 황해도 연백을 떠나 인천에 정착한 조병헌(91) 할아버지의 일터다.   
할아버지는 1950년 6.25전쟁 때 피란을 나와 강화 교동도에 살았다. 고향의 가족들이 보고 싶어 고향에 돌아갔다가 1951년 1.4후퇴 때 다시 남쪽으로 왔다. 고향에서는 농사를 지으면서 옷 수선 기술을 배웠다. 벽란도에서 개성을 거쳐 서울로 내려온 뒤 경남 구포에서 국군 제2국민병으로 끌려 나가 전쟁에 참여했다. 국민령이 해제되면서 할아버지는 전쟁터에서 나올 수 있었고, 일해주고 밥 얻어먹고 보릿겨, 수수겨죽을 끓여먹으며 죽을 고생을 하면서 인천으로 올라왔다. 고향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한동안 교동에 살았다. 교동도에서는 고향이 보였다. 그곳에에서는 HID(방첩대) 문관으로 일했고 통일이 어렵다는 판단이 서면서 인천으로 왔다.
결혼은 중매로 양인순 할머니(83)와 신포동 인천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신혼살림을 차린 곳은 송림동이었다. 달콤한 신혼은 작은 단칸방에서 시작됐다. 인천으로 나온 할아버지는 당시 신포동에서 유명했던 문화양복점 점원으로 들어가 양복 기술을 배웠다. 이것이 기반이 되어 중앙시장에서 양복점을 차렸다. 큰딸 낳고 시작한 양복점은 처음 반 칸짜리에서 시작했다. 주로 결혼식 예복을 도맡아 했고 단골손님도 많았다. 가게가 잘 되면서 조금씩 늘린 것이 지금의 평화양복점이다. 평화양복점 자리는 당시 동인천으로 가는 주도로에 있었기에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1층에서는 양복점을 하고 2층은 살림집으로 썼다.  
할아버지는 인천에 살기 위해 가호적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군대에 안 가려고 가호적을 만들 때 나이를 늘리거나 줄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젊은 시절 영화배우 신성일을 닮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이목구비가 굵직한 잘 생긴 청년이었다. 지금은 오랫동안 해온 양복 일로 미싱을 돌리고 재단을 하느라 등이 굽었다. 눈은 돋보기를 써도 실을 꿰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약해졌다. 할아버지는 최근 지하철 문에 발이 끼어 발목뼈가 부러졌다. 발목에 깁스를 하고 미싱을 돌린다.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지만, 동네주민들이 맡긴 바지나 양복수선, 짜깁기 일을 놓지 않고 있다. 할아버지에게 고향은 항상 그립고 애틋하다. 꿈에서조차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이다.



interview
10살 때 피란, 배고프고 죽도록 걸었던 기억
김문수 할아버지1941년생, 황해도 연백




양키시장은 적막하다. 오가는 사람도 없이 그저 상인들만 가게를 지키며 하루를 보낸다. 양키시장 내 ‘부흥사’는 잠바, 바지, 티셔츠, 청바지를 판다. 세월을 대변하듯 가게 간판에도 고단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 부흥사를 운영하는 김문수 할아버지(75)의 고향도 황해도 연백이다. 51년 1.4후퇴 때 인천으로 피란 나올 당시 그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어머니는 황해도 고향에서 돌아가셨고, 아버지와 육형제가 내려왔다. 1차 피란지였던 용매도는 황해도 연백 해변에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걸어서 건넜다. 용매도에서 잠시 살다 배를 타고 인천 만석동으로 와서 임시수용소에서 지냈다. 지금 만석부두 파출소 근처에 있던 5층짜리 임시수용소였다. 방 한 칸에서 온 가족이 임시로 지내다 송현동 26번지로 나왔다. 지금 송현아파트 부근으로, 옛날엔 초가집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송현동은 피란민이 아주 많은 동네였다.
김 할아버지의 형제들은 대성목재, 동양방직 등에 들어가 일하기도 하고 부두노동과 장사를 하며 살림을 보탰다. 그는 학교를 다녀야 하는 나이였기에 보합고등공민학교를 다녔다. 이곳은 초중등과정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학교 졸업 후 해병대를 다녀왔고, 형과 같이 살다 69년 중매로 결혼했다. 당시 형은 자유공원에서 평화촌이라는 슈퍼를 운영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피란 나오면서 배고프고 다리가 아팠던 기억만은 또렷하다. 아버지가 내려올 때 땅과 집문서와 미싱을 가지고 왔던 기억도 떠오른다. 미싱은 당시로선 귀한 물건이었다. 자유당 시절 아버지는 집문서와 땅문서를 맡기고 돈을 융통해서 썼다. 형님이 중앙시장에서 미군의 모포, 옷, 속옷 등을 팔면서 장사와 인연을 맺었다. 형님의 소개로 69년부터 중앙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자그마치 46년이 됐다.
김 할아버지가 인천에 정착한 이유는 통일이 되면 빨리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에서였다. 인천이 북한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69년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무로 된 빈지로 문을 열고 닫았다. 세월이 흘러 같이 피란 나온 형들은 다 돌아가셨고 넷째 형님만 생존해 있다.
중앙시장은 그의 평생 보금자리다. 이곳에서 일해 집도 사고 아이들을 키웠다. 요즘은 손님이 거의 없어 새로운 물건을 가져오지도 않는다. 예전에 떼다놓은 물건을 팔 뿐이다. 그의 마지막 소망은 시장이 재개발되는 것이다.



interview
산업역군에서 옷 가게 주인으로
이춘화 할머니1935년생, 황해도 연백




양키시장 ‘은영사’는 부흥사와 이웃하고 있다. 은영사를 운영하고 있는 이춘화 할머니(81)도 황해도 연백에서 1951년 1.4후퇴 때 남쪽으로 왔다. 아버지, 엄마, 동생 두 명이 피란을 나왔고, 오빠 둘은 학도병으로 갔다. 고향에서는 농사를 지었다. 연백 고미포에서 배를 타고 인천 괭이부리로 바로 왔다. 그때는 단속이 심하지 않아 마을사람들과 배를 구해 바로 인천으로 왔다.
만석동에 도착한 후에는 민가에 잠시 있다가 화수동 쌍우물 쪽으로 거처를 옮겼다. 1.4후퇴 후 아군이 계속 밀리자 다시 피란길에 올라 안산으로 내려갔다. 당시 안산은 생지옥이었다. 연일 포탄과 폭격이 이어졌고, 이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안산에서 먹을 것도 없고 살기가 힘들자 가족들은 감춰두었던 돈과 쌀을 가지러 북한으로 들어갔다.
다시 본 고향은 피란 전의 상황과 완전히 달랐다. 감시가 심해 몸만 빠져 나오기도 힘들었다. 그는 숨어 있다가 밀선을 타고 간신히 강화도 불은면으로 피란을 나왔고, 그해 가을이 돼서야 아버지와 동생들과 재회했다. 통일이 되면 금방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강화도에서는 1년여 살다가 휴전이 되면서 인천으로 왔다. 인천에서는 화수동에서 살았다.
이 할머니는 그 후 산업역군이 됐다. 강화도에서 비단 짜는 직조공장에 다녔고, 대구에서도 비단공장에서 비단(유똥)을 짰다. 서울 청량리에서는 나일론공장에서 당시 우리나라에 막 들여 온 나일론 원단을 짜는 일을 했다.
군인이었던 남편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군이었다. 군인 남편을 따라 강원도로 갔고, 다시 7년간을 춘천에서 살았다. 남편이 제대한 후 받은 퇴직금으로 1965년 중앙시장에서 옷 장사를 시작했다. 시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낮밤, 휴일도 없이 일해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대학까지 보냈다. 남편은 30년 전 저 세상으로 떠났다. 이 할머니는 혼자 살며 1평 정도 되는 가게를 온종일 지키며 손님을 맞는다. 인적이 드물다 보니 사람이 그립고 반갑다. 젊은 시절 우리 경제발전의 현장에 있었던 산업역군이었던 할머니도 세월은 비껴가지 못해 몸이 자꾸 아프다. 하지만 몸과 달리 마음은 피란 나올 때 ‘젊은 마음’ 그대로다.



interview
어려운 집안 장남으로 시장에서 잔뼈 굵어
김명구 할아버지1946년생, 황해도 연백




중앙시장에서 양말, 내의, 속옷 등을 판매하는 ‘단골상회’ 김명구(70) 할아버지는 중앙시장의 산 증인이다. 18세부터 그는 중앙시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는 고향 황해도 연백에서 아버지, 어머니, 동생 2명 등 총 다섯 식구와 피란을 나왔다. 다섯 살의 귀여운 꼬마는 어른들 틈에 끼여 쉼 없이 걸었다. 6.25 전쟁이 나자마자 연백의 염전 둑을 따라 걸어나와 소금을 실어 나르던 머구리배를 타고 덕적도로 갔다. 덕적도에서 2년간 살다 인천으로 왔다.
그의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은 2차로 피란을 나왔고, 삼촌은 월미도에서 바로 군대에 자원한 뒤 전쟁 중 사망했다. 피란 나올 때 가져온 것은 이부자리, 쌀 몇 부대 정도가 전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천으로 피란 와서는 송월동 외할머니집에서 다섯 식구가 방 한 칸에서 살았다. 송월동에서 살다 인하대 운동장에 피란민촌이 만들어지면서 용현동으로 이사를 갔다. 피란민촌은 방 하나 부엌 하나가 전부였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중앙시장 노점에서 사과박스를 놓고 과일 장사를 시작했으나 신통치 않았다. 이후 아버지는 용현동에 있던 미군 유류부대 경비로 일했다. 용현동 피란민촌에서는 방 한 칸에 아홉 식구가 살았다. 부모님이 인천에서 동생 넷을 더 낳았다. 작은 방 아랫목에 아버지, 어머니, 막내, 그리고 어린 동생 순으로 누웠고 윗목은 장남인 그의 자리였다. 아버지가 유류부대 경비로 일할 때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럭저럭 생활은 됐다. 5.16 이후 군대를 안 간 사람들은 부대에서 일 할 수 없다는 지침이 생기면서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됐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그는 당장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그리고 중앙시장에서 메리야스 가게의 점원이 됐다. 18세부터 장남으로 가족의 생활고를 함께 짊어져야 했다.
점원 생활은 10년간 이어졌다. 월급 없이 가게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배웠다. 10년간 일한 퇴직금 2백만 원으로 시계 하나 사고 노점을 열었다. 노점에서 돈을 모아 가게를 얻고 본격적인 메리야스 장사에 뛰어들었다. 젊을 적에는 타월, 메리야스 도매업을 주로 해서 자동차 6대로 부천, 부평, 인천 일대에 물건을 납품할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결혼은 28세에 했다. 신혼집은 그의 가게였다. 1층에서 장사하고 2층에서 살림을 했다. 메리야스 장사로만 53년째 중앙시장을 지키고 있다. 형이 시작한 일을 동생들도 함께했다. 셋째와 막내 동생도 타월과 메리야스 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중앙시장의 산증인이다. 시장의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변천사를 몸으로 겪었고, 현재도 시장을 지키며 예전의 영화를 되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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