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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길처럼 비탈졌던 그들의 삶

2015-06-02 2015년 6월호


비탈길처럼 비탈졌던 그들의 삶

살짝 발만 들어도 풍경은 달리 보인다. 까치발을 하면 보이지 않던 부분이나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평지에서 바라보던 거리와 동네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어떤 모습일까.
위성은 너무 멀고 헬리캠(helicam)이나 드론(drone)은 너무 비싸다. 그래서 올라갔다.
건물 옥상이나 교회 종탑에 올라 인천을 굽어보았다. 그 정도 높이임에도 인천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이번 호에서는 수도국산 기슭에서 송림동을 바라보았다.
글·사진 유동현 본지 편집장




까치발을 든 지점 | 수도국산 기슭 주택 건물 (동구 송현공원로 14-34)      
동구 송현동과 송림동을 품고 있는 수도국산 주변은 1998년 재개발로 3천여 가구의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인천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던 이곳은 우리네 힘겨웠던 시절의 모습과 흔적이 곳곳에 여전히 남아있다. 이번 달 까치발을 든 지점은 산 밑의 주택 건물 옥상이다. 개발 즈음 소방도로가 뚫릴 때 강영자 할머니(87)는 낡은 집을 허물고 3층짜리 집을 지었다. 당시 이 동네에서 제일 으리으리한 집이었다. 가파른 언덕에 들어섰기 때문에 뒤에서 보면 2층, 앞에서 보면 3층 건물이다. 산 위에 건물이 서 있는 덕에 웬만한 아파트 20층을 넘는 높이로 거칠 것 없는 시야다.

원래 이름은 송림산 혹은 만수산이었다. 산은 1910년 노량진에서 끌어온 물을 저장하는 배수지를 산꼭대기에 만들면서
수도국산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일제의 수탈로  도심지에서 밀려온 사람들이 산등성이에 움집을 팠다. 6.25전쟁 통엔 고향을 등진 피란민들이 산을 둘러싸고 솥단지를 걸었다. 그렇게 이 산은 빈민(貧民)과 난민(亂民)을 품었다. 사람들은 수도국산 앞 부처산에도 빈궁한 거처를 마련해 고닲은 삶을 이어갔다. 달동네 사람들은
매일 비탈진 고갯길을 내려와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염전과 공장에 기대어 밥벌이를 하며 살아왔다. 그들의 삶은 비탈길처럼 비탈졌다.



① 피란민 수용소촌 : 수도국산과 이어진 작은 산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산을 그냥 ‘돌산’이라고 불렀다. 한때 채석장으로 사용될 만큼 단단한 암석으로 된 산이었다. 이 산 아래 작은 동네가 있었는데 원래 이곳은 피란민 수용소촌이었다. 6.25전쟁 때 황해도 등 이북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합판, 천막 등을 주워서 집을 짓고 살면서 자연스럽게 난민촌을 형성했다. 그들은 빈손으로 내려와 ‘3.8 따라지’라는 천대 속에서 가난하게 시작했지만 특유의 근면성과 강한 의지로 낯설고 물 선 남한 땅에서 성공적인 삶을 개척해 나갔다. 



② 똥고개 : 이 산의 비탈길은 흔히 똥고개라고 불렀다. 지금의 서흥초교 위쪽으로는 1960년대 말까지 온통 비탈진 배추밭이었다. 농부들은 배추 수확을 하고 난 자리에 웅덩이를 파서 인분을 퍼 날랐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이게 얼어붙어서 땅과 구분이 가질 않는 웅덩이로 변했다. 이웃 동네에서 온 아이들은 비탈길을 가로지르다 웅덩이에 빠지는 난감한 ‘사고’를 심심치 않게 당했다. 1977년 똥고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송림6동 현 송림체육관 자리에 송림위생처리장이 설립되었다. 인천 각지에서 수거된 분뇨가 이 ‘똥공장’에서 처리되는 등 이 동네는 인분과 관련이 많았다. 그런 연유로 백병원 앞 사거리의 명칭은 인분을 미화한 ‘황금고개사거리’라고 명명되었다.         



③ 현대극장 : 1960년대 초 500평 규모의 2층짜리로 개관했다. 시내도 아닌 변두리에 극장이 들어섰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시내 영화관에서 몇 달 전에 내린 영화 두 편을 동시 상영했다. 현대극장은 지역의 랜드마크였다. 이 일대는 송림동이란 명칭보다 현대극장 동네로 통했다. 현대극장은 1998년 2월에 문을 닫았다. 한동안 비어 있다가 현재 할인마트가 들어섰다. 더 이상 은막에 빛이 들어오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현대극장은 이 동네의 중심이다.

④ 현대상가와 현대시장 : 현대극장 바로 옆에 1971년 아래층은 가게, 위층은 살림집인 일종의 주상복합건물인 ‘현대상가’가 들어섰다. 이 터는 인근에서 키운 배추 등으로 채소 경매를 하며 노점상들이 장사를 하던 곳이다. 상가 건립을 추진하면서 노점상들을 길 건너 시장 깡마당 빈터로 강제 이주시켰다. 쫓겨난 노점상들은 결속을 다지며 상권을 형성해 동부시장을 설립한다. 이후 원예협동조합공판장, 동구상가, 궁현상가, 송육상가, 중앙상가 등을 ‘현대시장’의 이름으로 한데 아우르며 한때 인천 최대의 시장으로 발전한다. 반대로 현대상가는 몇몇 포목점이 장사를 했을 뿐 제대로 분양이 되지 않아 상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점차 빈민가처럼 되었다.



⑤ 닭알탕집 거리 : 현대시장 길 건너 알록달록한 간판을 단 ‘닭알탕’ 전문 주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닭알은 죽은 암탉의 배 속에서 꺼낸, 달걀이 못된 알이다. 50년 전 맞은편 현대시장 닭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닭알을 포장마차에서 얼큰하게 찌게로 끓여 내놓으면 신메뉴가 되었다. 현대제철과 인근 철공소에 다니던 노무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닭알탕’ 전문 주점들이 생기면서 아예 닭알탕 거리가 되었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에 소개되면서 전국적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⑥ 부처산 : 일제강점기 때 돌부처 88개가 똬리를 틀고 있던 일본절이 있었다는 이유로, 혹은 산등성이 부처 형상이라 하여 ‘부처산’ 혹은 ‘부채산’이라고 불렀다. 광복 후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특히 좌익이 많이 거주해 6.25 전쟁 때 미군으로부터 집중 공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전쟁 후 피란민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1990년 9월 11일 (옛)박문여고와 선인중학교 사이 부처산 축대가 무너지면서 수백 톤의 흙더미가 가옥 12채를 덮쳐 2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⑦ 무선(無線)학교 : 1955년 부처산 꼭대기에 설립한 학교로 모르스 부호와 진공관 라디오 기술을 가르쳤다. 당시 모르스 신호 등 무선 기술이 각광받던 시절로 졸업생들은 체신부 등에 취업했다.  1965년 미군의 시멘트와 철근의 원조를 받아 교사를 짓는 등 학교를 확장했다. 부처산을 중심으로 앞쪽 아래 박문여자중고등학교. 우측에 성광고등학교(선인재단 전신), 좌측에 무선학교가 있었다. 대헌공고, 대헌전자공업전문학교 등을 거쳐 현재의 재능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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