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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 일본육군조병창의 소녀들

2015-08-04 2015년 8월호


부평 일본육군조병창의 소녀들

지영례 할머니를 만난 날은 6월 중순인데도 무척 더웠다. 할머니는 인터뷰 장소인 배다리 한 건물의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꽤 힘겹게 올라오고 있었다. 70년이 지났다. 일본육군조병창을 그만둔 후 일흔 번 새해를 겪었다. 이제는 기억도 사라졌고 그날의 일들이 꿈결처럼 멀어질 때다. 땀이 식을 때쯤 지 할머니는 그동안 잊고 지낸 어린 시절의 경험을 천천히 끄집어내 들려주셨다.
글 김현석 시민과대안연구소 연구원


일본육군조병창 내 병원 서무과 직원들(지영례 할머니 소장 사진)

지영례(82) 할머니가 ‘충주 지 씨’ 집안에 태어난 건 1928년이었다. 세상에 눈을 떠 보니 남의 나라 땅이었다. 조선의 흙과 조선 사람들은 그대로였지만 이미 ‘식민’이 일상이 된 나라였다. 지 할머니는 소화동초등학교(현 부평동초등학교)를 다녔다. 여기서 일본어를 배웠다. 조선말을 하는 게 오히려 서툴던 시절이다. 학교에서는 매일 아침 조회를 했다. 비가 오면 교실에서 했다. 선생님들이 시키는 대로 구호를 외치고 궁성요배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한 곳은 소화고등여학교(현 박문여고)였다. 시험을 봐서 입학했다. 부평역 너머 산 밑에 있던 2층짜리 학교였다. 지 할머니의 집은 ‘뫼꽃마을’에 있었다. 원적산 근처 산곡동에 있던 동네다. 여기서 태어났고 결혼할 때까지 살던 고향이다. 학교까지는 십 리 길이었다. 꼬박 한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다.

“그때는 시골이니까 논길 밭길로 다녀요. 가는 길에 큰 내가 있는데 장마가 지면 문제였어요. 한번은 친구들 셋이서 같이 학교를 가는데 다니던 길이니까 여기로 가면 길일 거라고 짐작해서 어깨동무하고 갔더니 발이 붕 뜨는 거예요. 그러더니 떠내려가요. 셋이 꼭 붙들고 울고불고 악을 쓰는데 남자 어른이 논에 나왔다가 건져줘서 살았어요. 비만 오면 아주 그게 제일 걱정됐어요.”
학교를 끝까지 마칠 수는 없었다. 한창 ‘정신대’를 뽑는다고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끌려가지 않으려면 직업을 갖고 있어야 했다.

“정신대를 보낸다고 날마다 와서 이름을 적어갔어요. 직장에 다니면 데리고 가지 않는다고 해서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여자들은 집에 있으면 다 정신대 끌려간다고 했어요. 동네 반장이 찾아와서 이름, 나이, 생년월일을 적어 가면서 돈벌이 시켜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마침 오라버니 친구가 조병창에 다니고 있었어요. 공장에서 반장으로 있었는데 우연히 손을 다쳐서 의무과에 갔더니 거기도 여자들이 있더래요. 조병창 안에 있던 병원이죠. 그래서 그분이 서무과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물어 보니까 거기서 여자들을 뽑는다고 해서 그 양반이 얘기 해줘서 나를 서무과에 넣어줬어요. 들어갈 때 시험이나 면접 같은 건 없었어요. 그땐 다들 아는 사람 통해서 알음알음으로 들어갔어요.”

열다섯 살 때였다. 소화고등여학교 2학년을 다니던 중이었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신대’에 가지 않으려면 학교를 자퇴하고 취직을 하는 게 유일한 탈출구였다. 20∼30명의 한 반 인원 중 절반 이상이 자퇴를 했다. 지 할머니가 나올 때도 같은 반에서 동기생 열 명이 함께 학업을 포기했다. 그렇게 나와 조병창에 취직한 아이들은 대개 ‘생방(旋盤)’ 공장으로 들어갔다. 거기 가면 기름 묻히고 힘들다고 알려진 곳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당시 소화고등여학교에는 일본 아이들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자퇴를 한 건 조선 아이들뿐이었다. 일본 아이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 일자리를 얻기 위해 들어온 경우가 많았다. 지 할머니는 지인 덕에 다행히 편한 자리를 얻어 조병창에서 일을 시작했다.


지영례 할머니

“병원 서무과에 심부름꾼으로 들어갔어요. 간호사 대신 일을 한 거죠. 조병창 안에서 환자를 안내하는 일이었어요. 서무과에 책상 하나 갖다놓고 다친 사람들이 찾아오면 ‘외과 갈 사람은 외과, 내과 갈 사람은 내과’ 도장을 찍어서 이름 쓰고 진찰권 끊어주는 일을 했어요. 공장에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아이들도 많이 있었죠. 한번은 어떤 아이가 옷이 기계에 빨려들어가는 바람에 팔이 하나가 떨어져서, 팔 하나 따로 가져 오고 좀 있다가 아이를 따로 데려 오고 하는 일도 있었어요. 다친 사람이 많았어요. 조병창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치료하던 병원이었어요.”

병원은 2층 건물이었다. 흔히 의무과라고 불렀다. 정문 근처 개천 옆에 건물이 있었다. 외과, 내과, 치과, 안과 등 과별로 구분되어 있었고 의사는 일본 사람이었다. 지 할머니가 있던 서무과는 20여 명 정도가 근무했다. 처음 입사를 하고서 환자를 다루는 법 등 업무 내용에 대해 일주일 정도 교육을 받았다. 이어 신입 시절에는 조병창 밖으로 나가 정보를 수집하는 일도 맡았다. 두 명 또는 세 명씩 짝을 지어 조병창 근처 동네를 돌아다니며 대면 조사를 했다. 어느 병원을 다니는지, 어떤 병이 돌고 있는지, 이런 걸 물어보고 기록하는 일이 주 업무였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교대로 진행하던 일이었다.

조병창에서는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했다.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걸어서 출퇴근했다. 조병창 정문은 부평역 방향에 있었지만 ‘하쿠바초(白馬町)’ 쪽에 있던 뒷문을 통해 드나들었다. 공장 주위는 벽돌로 담을 쌓아 놓았고 출입구마다 경비가 서 있었다.

“문마다 한국 사람들이 서 있었어요. 그 사람들만 따로 뽑았나 봐요. 교대로 경비를 서더라고요. 작은 총을 갖고 있었어요. 문을 통과할 때 검문을 하거나 몸수색을 하지는 않았어요. 갖고 나올 게 있어야죠. 일본 사람들은 문에는 없었고 안에서 돌아다녔어요. 긴 칼 차고 긴 구두 신고 철컥철컥 거리면서 다녔어요. 그게 얼마나 무섭던지. 뒷문에서 병원까지는 지그재그로 걸어서 가야 했어요. 공장들도 많았지만 창고도 많았어요. 공장에서 만든 물건들을 쌓다 두던 곳이죠. 안에 기차가 다녀서 가끔 물건들을 싣고 가기도 했어요.”


일본육군조병창 내 병원 서무과 직원들(지영례 할머니 소장 사진)

조병창에 들어갈 땐 근무복을 입어야 했다. 집에서부터 입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공장 안에 비치해 둔 것들 중에서 맞는 것을 골라 개인 돈으로 구입하는 방식이었다. 점심 식사는 병원에 붙어 있는 식당에서 했다. 식대는 월급에서 제하고 나왔다. 서무를 보는 사람보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월급을 더 많이 받았다. 3년 정도 근무하던 중 광복이 되었다. 아주 큰 변화가 있던 건 아니다. 더 이상 출근을 하지 않게 됐을 뿐이다.

“일하는 게 다르더라고요.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모이면 무슨 말인가를 수군수군하더라구요. 공장에서 기계도 돌리지 않고 그 전하고 일하는 게 달랐는데 광복이 되어서 일본 사람들이 쫓겨 들어간다는 말이 들리더라구요. 공장을 가동하지 않으니까 병원도 할 일이 없었죠. 서무과에 반장이 있었는데 한국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도 그만두어야 하겠다고 해서 출근을 안 했어요. 그때 학교에 있던 일본 선생들도 다 쫓겨 들어갔어요. 해방되고 사람들이 일본인들 사는 집 찾아가서 밤새도록 대문 두드리고 난리를 쳐서 일본 사람들이 살 수가 없었어요. 다치거나 그런 사람들은 없었어요.”

지 할머니의 식민지는 그렇게 끝났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군거림 속에서 광복은 그렇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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