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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굉일우八紘一宇, 인천부민을 전쟁에 동원하라
팔굉일우八紘一宇, 인천부민을 전쟁에 동원하라
하와이 진주만 공습 후 전장이 확대되면서 조선총독부의 가장 큰 현안은 조선 사람들에게 전쟁을 선전하고 홍보하는 일이었다. 중·일전쟁 직후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이 그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일본에 대한 각국의 견제가 심해지자 1940년 10월
이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을 새롭게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중앙과 지방 조직으로 구분되었고,
지방조직은 8도의 연맹부터 최하층 말단 조직인 애국반까지 단계별로 구성되었다. 이와 함께 국민정신 함양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황국신민의 서사’라는 맹세문을 만들어 조선인들에게 무조건 외우게 하였다.
글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애국반 1942년 7월호(인천시립박물관 소장)
# 후방 총력전의 선봉, 애국반(愛國班)
1940년 10월 29일 국민총력연맹의 인천지회인 국민총력인천연맹이 결성되어 이사장에 나가이 테라오(永井照雄) 인천부윤이 취임하였다. 미국과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던 1941년 10월 나가이 부윤은 대동아공영의 신체제를 건설하는 최전선에 인천부민들이 앞장서 줄 것을 담화로 발표하였다. 같은 해 11월 26일 경성 부민관에서 개최된 국민총력연맹 제2차 이사회에 인천육군조병창장 다이코 키자브로(大幸喜三郞)와 인천경방단(仁川警防團)의 부단장 무카이 사이이치(向井最一)가 인천대표로 참석하였다. 1942년 당시 국민총력인천연맹에 속해있던 마을단위의 정(町) 연맹은 모두 70여 개였고, 그 휘하에 10호 단위로 조직된 애국반 3천200여 개가 있었다.
애국반에서는 매월 1회씩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초기에는 황국신민화를 위하여 신사참배와 애국반회 참가를 요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으나, 전쟁의 확대와 함께 징병과 노역에 자발적 참여와 적극적인 헌납, 공출을 독려하는 기사가 수록되었다.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애국반’은 1943년 7월에 발행한 것으로 모두 4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1면과 4면은 신문의 형식을 빌려 기사와 정보, 만평을 싣고 있는데 밀정을 조심하자는 내용과 함께 민적에 등록하여 징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자는 기사가 주를 이룬다. 2면과 3면은 ‘호적에 누락된 사람이 없게 하자’는 계몽적 성격의 포스터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한편 중ㆍ일전쟁이 시작되자 일제는 조선인들의 전쟁동원을 수월하게 하기 위하여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내선일체화(內鮮一體化)’ 등의 이론적 바탕을 마련하였다. 이와 동시에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국민정신 함양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황국신민의 서사(皇國臣民ノ誓詞)’라는 일종의 맹세문을 만들어 조선인들에게 무조건 외우게 하였다. 아동용과 일반용 두 종류가 있는데 관공서와 학교에서는 조회시간에 이를 암송시켰으며, 개인기업과 대규모 상점에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낭송을 강요했다고 한다.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된 ‘황국신민의 서사’는 국민정신총동원인천연맹과 인천부에서 공동으로 제작하여 배포한 일반용 자료로 일본어 내용의 좌측에 한글 독음을 기록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한글 번역이 아닌 독음을 기록한 것은 맹세의 내용보다 암송이 더욱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탄피(러일전쟁 전리품)

신흥초등학교 교정의 러시아 함대 포탄
# 러·일전쟁의 기억을 활용하라
1904년 러ㆍ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에 단순한 ‘승전’의 의미를 넘어서는 일대 사건으로 그로부터 일본인들은 대륙과 태평양을 향한 더 큰 꿈을 꿀 수 있었다. 일본은 이 전쟁을 황인종이 백인종을 격멸한 최초의 전쟁이라 칭하는 한편,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린 싸움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러ㆍ일전쟁의 첫 승전을 알렸던 인천은 일본인들에게 기념비적인 공간이었다. 당시 인천 앞바다에 자폭하여 침몰한 러시아 전함의 잔해를 전리품으로 나누어 갖는가 하면, 인천 여행책자에 월미도를 러ㆍ일전쟁의 승전지라 소개하면서 ‘이곳에서 러시아 군함이 침몰한 바다를 바라보며 역사를 회고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러ㆍ일전쟁의 기억은 그로부터 약 38년 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다시 활용된다. 백인종 러시아를 이겨냈다는 경험을 국민에게 되새겨 미국과 벌이는 전쟁을 승리로 끌어내겠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속셈이었다. 그런 일제의 속셈을 충족할 수 있는 장소 중 하나가 인천이었다. 1941년 4월 응봉산 정상 옛 세창양행 사택 건물에 자리했던 인천부립도서관(지금의 미추홀도서관)이 이전하자 인천부에서는 그 자리에 약 1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1942년 6월 20일 인천향토관을 개관하였다.
인천향토관은 주민에게 기증받은 각종 고고유물과 인천의 기념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러ㆍ일전쟁 당시 침몰한 러시아 전함의 잔해인 전함기, 포탄, 총, 닻 등을 전시하였다. 일제는 이를 통해 인천부민은 물론 인천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승전의 기억과 경험을 활용하여 태평양전쟁의 당위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당시 인천향토관에 전시되었던 러·일전쟁의 잔해들은 광복 후 개관한 인천시립박물관에 그대로 인수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승전의 기억은 자라나는 어린이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어린이는 앞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세계에 전파할 훌륭한 재목이었기에 이들에 대한 사상교육이야말로 당장의 전쟁수행 못지않게 중요하였다. 당시 인천부 화정(花町; 현 신흥동)에 위치했던 아사히공립국민학교(현 신흥초등학교)는 일본인 아동에게만 입학자격이 주어졌던 학교다. 인천부에서는 인천향토관에 전시되었던 것과 똑같은 러일전쟁 당시의 포탄과 러시아 군함의 돛대를 이 학교 교정에 세워놓았다.
일본인 아동들이 전부였던 이 학교의 학생들에게 40년 전 러시아를 상대로 한 승전의 기억을 전달하면서 황국신민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자세와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했던 것이다. 1940년대 일본인 학생들에게 러ㆍ일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게 했던 그 포탄과 돛대는 7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이 학교의 교정에 남아 있다.

1940년대 경정(현 겸동) 유기공출기념사진(부평역사박물관 소장)
※팔굉일우(八紘一宇) : ‘팔방이 하나의 지붕아래 있다’는 의미로 여기서 팔방은 세계를, 하나의 지붕은 일왕을 가리킨다.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논리를 뒷받침하는 주요 개념으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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