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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망 일본인들, 미군에게 일장기 팔아

2015-08-04 2015년 8월호


패망 일본인들, 미군에게 일장기 팔아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이 항복 방송을 하였다.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대부분은
일본이 미국에 항복을 선언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왕이 직접 항복을 선언한 것이었다.
당시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하루아침에 죽음의 골짜기로 추락하는 것 같은 큰 충격에 빠졌다.
글 이성진 인천영화관광경영고 교사


일본인들에게 산 일장기를 앞에 두고 기념사진을 찍는 미군들

지배자 일본인에서 패망자 일본인으로 전락하면서, 피지배자였던 조선인들이 자신들에게 보복을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공포심에 떨어야만 했다. 특히 조선인들의 습격이나 위협 및 생명 재산상 안전에 대한 공포심은 더 심했다.
당황하기는 인천 거주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해방을 처음 맞이하는 일이고, 그 해방이 정말 온 것인지 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일본이란 거대한 나라가 그냥 하루아침에 패망하였다는 소식에 어리둥절할 뿐이었고, 해방이 되었다는 그 자체가 그냥 좋을 뿐이었다.
 
우리가 화수동 동사무소 옆에서 살았거든, 사람들은 그냥 맥도 모르고 좋아서 그냥 다들 좋아했지. 팔월 십오 일 날, 극장에 가려고 시내에 나가니까 다른 때보다 사람들이 많이 돌아 댕겼지만, 만세를 부르고 그런 일은 없었어.(박상규 1922년 6월 30일생)
 
그렇게 갈망해 왔던 해방이 하늘에서 호박이 넝쿨째 떨어지듯 그렇게 우리에게 떨어졌다. 조선인들은 드디어 해방이 왔다는 현실을 실제로 체득하면서 거리로 뛰어나와 만세를 부르면서 해방을 알리고 그 기쁨을 함께 만끽하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패망국민인 일본인에게는 그 광경 자체가 마치 미쳐 날뛰는 망나니처럼 받아들였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하는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밤이 되면 조선인들이 횃불을 켜들고 거리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광희난무(狂喜亂舞)하는 일은 17, 18일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일본인을 습격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문을 잠그고 전전긍긍하였다. (인천인양기, 所谷益次郞, 황해문화 2001. 봄호)
 


미군 환영 인천시가행진(1945.9.7)


이러한 일본인들의 공포심은 조선인들이 시내 중심가로 나와 만세를 외치는 것조차 자신을 공격하려는 것이라고 예단하였다. 그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조선인 시위대를 일본 헌병대가 무력으로 진압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일본인 중에는 9월 초순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으로 도망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특히 2, 3일 내 미군이 인천항으로 상륙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돌면서 다급해진 일본인들은 가재도구를 비롯한 소유재산을 조선인에게 매각하기 시작하였다. 부동산까지도 조선인에게 전부 팔았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해서 돌아가지만 되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던 일본인 상점주들은, 상점을 비롯해 일본으로 가져갈 수 없는 재산을 몽땅 조선인 점원에게 물려주기도 하였다. 조선인 점원 중에는 일본인 상점주가 준 상점과 부동산으로 하루아침 벼락부자가 된 경우가 있었다.
드디어 9월 8일 기다리던 승전국 미군이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미군은 패망국민인 일본인에 대해 강력한 통제와 감시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너그럽게 대하였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최대한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매각해서 돈으로 바꾸어 일본으로 돌아가고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인들은 인천에 주둔하는 미군을 상대로 일본혼이 들어 있다고 그렇게 자랑했던 일장기까지 전리품으로 판매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귀국하는 일본인 행렬(출처·인천일보)


항도 인천에는 때아닌 일인 만물상이 제멋대로 속출하고 있다. 갖은 비열한 수단을 다 써서 우리의 피와 땀을 짜내던 그네들은 이와 같이 쫓겨가는 바에는 한 푼이라도 많이 가져가려고 그 본성인 야욕을 발휘하여 인형, 불상, 궁시(弓矢), 화병, 샤미생 기타 각종 기기묘묘한 골동품, 가재도구 등등을 각기 현관방에다 진열하여 두고 미군인 손님 오시기를 기다려 접대에는 농(濃)화장을 한 젊은 며느리 또는 딸들이 애교를 떨며 미군이 물가사정을 모르는 것을 기화로 하여 엄청난 고가로 팔고 있다. 그들의 개점은 전상공회의소 회두 모씨의 저택을 위시하여 뒷골목 거주 일인까지 가지각색의 진품을 진열하고 있는데 그 중에 가소로운 동시에 한심한 것은 일본국기를 진열하고 미군에게 팔아먹는 것이다. 그것은 미 군인이 전승기념으로 일본국기를 잘 사는 탓인데 아무리 게양을 금지 받는 패망 국가라 할지라도 소위 그네들의 국민정신을 입혼시켰다고 뒤떠들던 것이고 보니 무심할 수 없다. 그런데 묘한 것은 미군들은 소위 전승품이라고 하여 새 국기는 안 사고 낡은 것만 사 간다는 것이다. (조선인민보, 1945.9.23.)

일본인들이 귀국하고자 할 때 소지 한도를 현금 1천원과 소량의 짐만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소형 선박을 마련해 소유 재산을 다 싣고 야반도주하다가 인천부두국 감시과원에게 적발되어 출항을 금지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를 철저하게 감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인원이 부족하여 대부분은 그렇게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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