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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뛰어놀던 주안염전의 추억

2020-01-03 2020년 1월호




어릴 적 뛰어놀던

주안염전의 추억

 
글 박병상 환경운동가
 
인천에서 태어나 군 생활을 제외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으며 환경 운동을 하는 생물학 전공 서생이다. 생태학적 다양성은 물론이고 사회·문화적 다양성이 보전되어야 사람의 삶도 건강하게 지속가능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성공회대학교에서 생태주의 시각으로 강의하고 있다.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가 방문한 1966년 이후였을까? 6차선 경인국도의 2차선만 겨우 포장된 도로의 가장자리는 우마차가 점령한 시절일 거다. 사상 최초로 올림픽을 연속 제패한 아베베 비킬라 선수가 ‘928 서울 수복 기념 국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우승하던 때, 경인국도 좌우는 논과 밭이었다. 주안의 논밭이 그 시절을 지나면서 사라졌다. 무심결에 주안의 논밭을 보았을 아베베 선수가 운동화를 신고 선두로 뛸 때 검정 고무신을 신은 조무래기들은 아베베를 따라 쪼르르 내달렸다.

지금 젊은이들의 문화 창작 지대를 예쁘게 꾸며놓은 인천지하철 2호선 시민공원역 주변은 2000년까지 시민회관이 자리했고, 시민회관이 들어서기 전에는 논이자 꼬맹이들의 놀이터였다. 모기장 천으로 자루처럼 만든 잠자리채, 문방구에서 파는 요즘과 같은 상품이 아니었다. 온 동네 거미줄을 덕지덕지 묻힌, 배드민턴 라켓 비슷한 잠자리채를 들고 논 가장자리의 물웅덩이 근처를 살금살금 고개 숙여 걸으면 낮지만 빠르게 날아오는 왕잠자리를 만날 수 있었다. 이승엽 선수처럼 휘두르면 소용없었다. 꼬마보다 빠르게 날아 냉큼 달아났다. 거미줄 묻은 잠자리채를 날아오는 방향에 맞춰 느닷없이 들이밀어야 겨우 붙었다.

왕잠자리 잡다 지겨우면 주안역을 넘었다. 간이역보다 소박했던 주안역을 넘으면 염전이 펼쳐졌다. 인천 사람의 애환, 바다가 지척이지만 수영을 배우지 못했다. 바닷물을 담아놓은 저수지에서 여름방학을 보낸 우리는 물에 동동 뜨니 수영 따위를 따로 배울 필요가 없었다. 저녁 무렵 우리들 손에는 망둑어 한 사발 담은 주전자가 들려 있었다. 분명히 놓쳤는데, 입이 찢어진 채 다시 올라온 망둑어, 혹시 짱뚱어는 아니었을까? 체계적으로 보전하기에 순천만에 겨우 남은 짱뚱어가 주안 갯벌을 돌아다녔을까?

아베베와 잠깐 같이 뛰던 시절, 경인국도 남쪽의 밭에 보리가 자란 무렵이니 봄일 텐데, 그 사이를 기어 다녀도 바깥에서 보이지 않았다. 한바탕 보리 수확을 마치고 채소가 자랄 즈음이면 우리는 코를 막아야 했는데 왠지 조용했다. 잘 삭은 거름을 뿌려놓은 밭은 개구쟁이들을 받아주지 않아 우리는 골목에서 자치기에 열중했는데, 짐칸이 올라가는 트럭을 처음 보았다. 방치되던 보리밭에 커다란 트럭들이 모여들어 흙을 토해내는 게 아닌가. 이후 보리밭은 상자처럼 다닥다닥 붙은 집들로 바뀌었다.

술자리의 어른들이 주안염전이 공업단지로 바뀐다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주안공업단지에 일자리를 구한 사람들이 살 집을 그렇게 지었고 우리는 놀이 공간을 거듭 잃어야 했다. 경인국도 북쪽의 논도 그 무렵 매립돼 주택으로, 교회와 은행으로 거푸 바뀌었으므로. 1960년대, 조무래기들은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고등학교 입시에 매달려야 했다. 이후 동네는 몰라보게 바뀌었지만 관심 밖이었다. 겨우내 썰매 지치고 스케이트 타던 들판은 온통 주택으로 변했는데, 청소년이 된 우리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억지로 보류했다.

고교 시절 만난 친구들은 목표가 뚜렷했다. 좋은 대학을 거쳐 좋은 직장에 들어가 승승장구하는 인생의 초석 쌓기에 매진했다. 모두 성공한 건 아니더라도 대개 그 길로 들어섰다. 국가의 발전이 내 발전이라는 신념으로 젊음을 투신하며 지역보다 중앙에 진출하길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세대 이상 흐른 지금, 인천다움을 잃은 인천에서 주안의 옛 모습은 찾을 길 없다. 서울, 부산, 광주, 부천, 그리고 인천, 겉모습은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가? 직장이나 아파트 때문에 이사한 인천 시민 중에 자식과 지역에 남으려는 이를 만나기 어렵다. 발전은 옳은 일, 돈 많이 벌면 좋은 일이라 믿고 살아온 지 50여 년이 지나자 돈보다 건강, 내 발전보다 자식과 이웃의 행복이 훨씬 살가운 일이라는 걸 되새기게 된다.

젊었을 때 아베베처럼 앞만 보며 뛰었지만 나이 들자 터전에 뿌리내리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논밭에서 잠자리 잡고, 과수원 언덕에서 연을 날리던 시절의 기억이 오롯해서 그런지, 원고를 생태적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여느 농촌보다 시골이던 시절의 주안 기억이 지금도 새삼스럽지 않으면 지금도 살가울 텐데, 인천의 옛 기억을 조금이라도 되돌리면 안 될까?

 


 
 

1907년에 조성된 주안 염전
사진출처: 화도진도서관



 
박병상  저 < 어쩌면 가장 위험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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