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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인천-인천대학교 이사장 최용규

2020-07-02 2020년 7월호


희망 품고 찾아와

꿈을 펼친 인천


글 최용규


충청남도 서천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마치고 송도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러한 내 눈에 비친 인천은 촌놈의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멋진 대도시였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맛보는 라면, 동인천역 앞에 잔뜩 모여 있던 리어카 짐꾼 아저씨들, 공설운동장의 개싸움, 싸리재 입구 상업은행의 에스컬레이터가 신기했다. 자유공원 아래 화교촌의 중국인 아이들, 만석동 조선소에서 나오는 나무 껍데기(자취집의 연료), 한국유리에서 가져온 놋그릇 닦는 모래도 청소년기 기억의 편린으로 남아 있다. 하인천역 뒤편 만석부두의 생선과 해산물을 파는 아주머니들, 밤에 똥고개에서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인천제철 용광로의 거대한 불기둥, 송림5동 사무소 옆의 구수한 어묵 공장, 배 타고 가본 강화도의 마니산과 전등사 등 좁은 세계에 갇혀 살던 열세 살 꼬마의 눈에 인천은 요지경이었다.

처음 편성된 중학교 반에서 내가 크게 위안받은 것은 같은 반 급우의 3분의 1 정도가 나처럼 충청도 등 지방에서 온 아이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천 태생의 친구들과 출신지에 따른 이질감이 전혀 없었다. 내가 존경하는 인천의 어른께서 즐겨 인용하시는 해불양수海不讓水의 뜻도 모르던 시절이었는데 당시 내가 느낀 감정이 바로 해불양수였다.

하인천 철도공무원 관사 하숙집에서, 도화동 인천체육관 아래 하숙집에서, 똥고개의 자취집에서 그리고 부평의 형님 가게에서 나만의 세계를 즐기던 아이에게 인천은 참으로 좋은 도시였다.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고 기회를 주는 가족과 사회에서 나는 내 소질을 충분히 발휘할 기회를 찾았고 그러한 나에게 인천은 내 소질을 충분히 키울 그릇이 되어주었다. 

부평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나에게 캠프마켓은 당연한 존재였고, 어릴 때부터 꿈꾸었던 은행원이 되기 위하여 서울에 있는 경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이후 고대 법대에 편입학해 사법 시험에 합격했다. 그렇게 평소 목표로 삼았던 검사직이었으나 검사시보 시절 차장검사와의 충돌 이후 다시 인천에 돌아와 변호사 활동을 시작한 것이 1988년이다. 서울 생활을 시작한 지 18년 만의 일이었다. 인천에 터를 잡은 지 약 2년쯤 지나자 길에서 “용규 아니냐? 오랜만이다” 하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역시 인천은 내 고향이구나 하는 편안함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정의감이 넘쳐나던 청년 변호사에게 1990년 한보그룹의 수서 사건은 사회정의에 대한 깊은 아쉬움을 줬고, 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인천시의원에 당선됐다. 1994년 북구청 세도 사건을 보며 내가 사는 지역의 비참함을 바로잡고자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구청장으로 출마해 전국 최연소 구청장으로 당선되며 내 속에 내재한 정의감을 마음껏 발산하기에 이르렀다.

국회의원을 하면서 사회보호법 폐지(청송보호감호소 폐지), 친일재산환수법 제정 등 평소 꿈꾸던 일을 마치고 나니 더 이상 국회에 있을 이유가 없어져 2008년에 불출마 선언을 하고 우크라이나에 버려진 동포들을 돕기 위하여 우크라이나에 가서 양파 사업을 추진했다. 평소 대한민국이 건국 이래 동포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나라라는 생각에 대한 개인적 실천이었다.

이후 주변의 권유로 인천대학교 이사장에 취임했고 와서 보니 인천대가 연변대학교와 중국 훈춘에 합작대학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내가 지난 12년 동안 농업을 통하여 유라시아 동포들을 돕고자 하던 일의 결정체가 여기에서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내 소망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뛰어난 농업 DNA를 갖고 있는 우리 동포들을 교육시켜 양파 재배와 판매로 유라시아 농산물 시장을 석권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 동포들이 해당 국가에서 주류 사회에 진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더 나아가 훈춘에 설립하는 합작대학에 북한의 대학을 참여시켜 학술 교류는 물론이고 겨울 양파를 재배하게 해 북한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통일을 앞당기는 그런 대학으로 인천대학교를 만들고 싶은 것이 내게 던져진 숙제다. 나는 지금도 꿈을 꾸고 있다.


최용규 인천대학교 이사장은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 가족이 인천으로 이사 온 뒤 줄곧 인천 사람으로 살아왔다. 사법시험 합격 뒤 검사가 되고자 했으나 제도권 문화가 싫어 이후 정치인으로 방향을 돌려 인천 발전과 바른 정치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89년 월미도 문화의 거리 개장 당시 모습

1982년 초봄의 동인천역 풍경

두만강학원 설립 협약식에서 조동성 인천대 총장,
김 웅 연변대 총장과 함께(사진 가운데)

연변대 개교 70주년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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