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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아침-칼럼

2020-10-30 2020년 11월호

훈맹정음,

송암 박두성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통찰력 깊은 눈빛과 군더더기 없는 화술, 89세라고 보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반짝이는 총기. ‘한글 점자’를 창안한 송암松庵 박두성(1888~1963)의 딸 고故 박정희 여사를 만난 때는 2011년 이맘때였다. 연시 한 봉지를 사들고 동구 화평동 냉면골목의 허름한 4층 건물을 찾아갔을 때, 박 여사는 여성 2명에게 그림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는 TV에 ‘인천의 그림 할머니’로 소개될 정도로 잘 알려진 화가였다. 송암 선생이 여자로 태어났으면 틀림없이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란 확신이 들 정도로 사진에서 본 송암과 닮아 있었다.
“아버진 스파르타식 교육자였어. 한 글자라도 빼먹거나 잘못 읽었다간 점자 번역기 아연판을 들어 날 때리는 거야. 처음엔 의붓아버지인 줄 알았다니까.” 철컥철컥. 송암은 여덟 살 딸에게 성경을 읽게 하고 자신은 아연판에 점자를 새겼다. 아내에겐 그렇게 제작한 성서 점역을 엮어 책자로 만드는 일을 맡겼다.
“아버지가 조선총독부가 운영하던 장애인 시설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일하며 점자를 연구하고 있으실 때였어. 한번은 제생원에서 함께 일하며 옆집에 살던 네모토 가이조란 일본인이 찾아오더니 그러는 거야. 잡혀갈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그때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 ‘내 형편에 애국이니 뭐니 따질 겨를이 없고 정치도 모른다. 나는 다만 맹생(시각 장애인)들이 먹고살려면 점을 치거나 침을 놓거나 해야 하는데 한글 점자가 없어 공부할 수 없으니 점자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이지.” 박 여사는 생전의 아버지를 ‘위대한 교육가’라기보다는 제자들을 사랑하는 ‘소박한 선생님’이었다고 회상했다.
시각 장애인이 천대받던 시대, 크리스천이었던 송암은 6명의 맹생 제자들을 데리고 묵묵히 점자를 연구한 끝에 1926년 11월 4일 한글 점자를 반포한다. ‘훈맹정음訓盲正音’의 탄생이었다. 이후 1936년 권고사직을 당한 송암은 그의 열정과 성실성을 인정한 기독교계의 도움으로 인천영화학교 교장으로 부임한다. 율목동 25번지에 터를 잡은 송암은 조선맹아사업협회를 조직하고 1957년엔 신구약 성서 점역 24권 완성 등 점자 활성화에 헌신하다 1963년 향년 76세로 타계한다. 그는 남동구 수산동에 안장됐다.
인천시 강화군 교동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박두성이 점자에 눈을 뜬 때는 1913년 제생원(현 국립서울맹盲학교) 맹아부 교사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이곳에서 그는 앞 못 보는 제자들을 자립시킬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연구한다. 한글 점자는 교사의 도리를 실천하려는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한 발명품인 셈이다. <굿모닝인천> 또한 송암이 만든 글자로 ‘점자판’을 발행해 매달 시각 장애인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훈맹정음 반포 94주년인 11월 4일을 앞두고 문화재청은 ‘점자표·해설 원고’ 등 송암의 유물을 문화재로 등록할 예정이라고 최근 밝혔다. 2022년 하반기 개관 예정인 송도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엔 ‘훈맹정음 상설전시관’이 들어선다. 송암이 유년 시절을 보낸 강화도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상정고금예문(1234)과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술인 팔만대장경(1251)이 탄생한 ‘제1 정보혁명의 성지’이기도 하다. 이 가을, 송암의 제자 사랑 마음만큼이나 광활한 교동평야가 황금 물결로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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