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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VS 세계 도시-인천 개항장 VS 베트남 하이퐁

2020-10-30 2020년 11월호

인천 VS 세계 도시 ⑧ 인천 개항장  VS 베트남 하이퐁

INCHEON OPEN PORT AREA VS HAI PHONG PORT AREA

하이퐁과 우리, 그리고 인천
1883년, 개항을 통해 대한민국은 근대화의 시작을 알렸다. 그 중심에 인천이 있었다. 지난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친 개항장은 당시를 짐작하게 하는 소중한 사료적 공간이자, 인천의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베트남에도 인천과 같은 역사를 지닌 도시가 있다. 하이퐁H?i Phong이다. 보이지 않는 역사적 끈으로 연결된 하이퐁과 우리, 그리고 인천을 들여다본다.

글 윤대영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셔터스톡



식민주의 정책 아래 탄생한 베트남의 개항장
하이퐁은 베트남에서 수도 하노이Ha N와 호치민H? Chi Minh시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다. 인구 200만 명(2018년 기준)으로 북부에서는 제2의 도시이자 주요 공업 도시이며, 북부 최대의 항만 도시이기도 하다. 남부의 사이공Sai Gon항과 함께 국제적인 해양 도시 하이퐁은 어항 이외에도 무역항과 군항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데, 항만에는 외국 선박이 많이 정박해 있어 항구도시 특유의 활발한 기운이 넘친다. 또 철도 교통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석탄과 쌀 등이 수출되며 해군 기지도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면 과연 현재의 하이퐁은 한국에게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대중국 항쟁의 중심지였던 하이퐁은 15세기부터 교역항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주변의 중국뿐만 아니라 서구의 상인들에게도 꽤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적극적인 식민주의 정책을 수행함에 따라, 1874년부터 하이퐁은 ‘개항장’으로 변모되기 시작했다. 인도차이나 식민 정권하에서 진행된 다양한 제국주의 정책은 하이퐁을 외부 세계에 보다 구체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프랑스 건축가가 지은 하이퐁 시내의 건축물



중구 신포로에 자리한 인천개항박물관 내부

역사 속 자리한 한국과의 인연
1895년부터 한국 사회에 소개되기 시작한 하이퐁을 직접 방문하는 일이 있었는데, 한말 강원도 지역의 항일 의병장이었던 민용호閔龍鎬(1869~1922)의 1902년 하이퐁 여행을 최초의 사례로 들 수 있다. 그리고 1910년의 한일병합 이후 주로 중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감행했던 독립운동가들은 광둥성(廣東省)의 군관학교 이외에도 윈난성(雲南省)의 군관학교에 젊은 청년들을 입학시켰다. 이때 윈난군관학교에서 수학한 대부분의 한인 사관들은 중국 남부와 홍콩 등지에서 배를 타고 하이퐁에 도착한 직후, 하이퐁에서 철도로 하노이를 거쳐 윈난성의 쿤밍(昆明)에 다다르곤 했었다.
1920년대부터는 한국의 각종 언론 매체들이 하이퐁 지역의 화교, 독립운동, 중일전쟁 당시의 현지 상황, 지정학적 중요성을 다룸으로써 한국인들의 관심을 점차 촉발시켜 나갔다. 그 결과 전성화田成和와 같은 한인 인삼 상인들이 1932년부터 하이퐁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에는 인도차이나 북부의 일본군에서 병영 생활을 했던 한인들이 하이퐁을 통해 귀국하기도 했다. 이후 한국 사회는 인도차이나전쟁(1946~1954) 당시 프랑스군의 하이퐁 점령이나 베트남전쟁(1965~1975) 때 미군의 하이퐁 폭격 등을 통해 하이퐁항의 비극적인 소식을 계속 접해야 했다.
이처럼 하이퐁에 대한 간접적인 정보가 한국 사회에 흘러 들어오면서, 한국인들의 하이퐁 체험은 더욱 구체화되어 갔다. 흥미 위주나 정보 획득의 대상이었던 하이퐁은 여행 중 잠시 들러 구경이나 하던 중간 기착지에서 변모하기 시작해 투쟁과 삶의 현장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들에게 하이퐁은 전술상의 요충지였고, 현지 교민들에게 하이퐁은 국내에서 견딜 수 없었던 가난을 털어버리고 다시 새롭게 출발하는 희망의 도시였으며, 군인들에게 하이퐁은 전쟁 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귀향의 출발지였던 것이다.


2017년 중구청 일대 개항장 거리에서 펼쳐졌던 개항장 컬처나잇 행사



1997년 우리 시와 자매결연을 체결한 베트남 하이퐁의 풍경

1997년 체결된 인천-하이퐁 자매결연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하이퐁이라는 지명도 한국인들에게 점차 잊히는 듯했다. 그러나 1986년 12월에 베트남 정부가 채택한 도이 머이(đ?i m?i, 쇄신) 정책은 하이퐁과 한국 사이에 존재했던 ‘역사적’ 끈을 부활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1992년 12월에 한국과 베트남의 국교가 재개되는 시점을 전후해 양국 간의 관계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나타난 하이퐁과 한국 간의 교류도 점점 왕성해졌다.
1992년 중반부터 국내의 선박 회사들이 베트남 항로를 개설하게 되었는데, 흥아해운, 동남아해운, 한진해운, 고려해운 등이 하이퐁 항구에도 진출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또 LG, 포스코, 두산, 한국통신 등의 하이퐁 현지 투자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해상 교통망의 확충과 국내 기업들의 적극적인 진출에 힘입어 하이퐁이 한국 사회에 점차 알려지게 되자, 최기선 당시 인천시장은 하이퐁시를 방문해 1997년 7월 25일 상호 발전과 화합을 위해 자매결연을 체결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양 도시의 자매결연은 양국 관계의 비약적인 발전이라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하이퐁과 인천이 공유할 수 있었던 ‘역사적’ 경험에서도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식민지화 과정에서 프랑스와 일본에 의해 소위 ‘개항장’으로 선택된 두 도시는 ‘근대’를 거치며 새로운 국제 항구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고, 그 원동력을 바탕으로 ‘현재’ 동아시아 해양 네트워크의 중요한 축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와는 ‘무의미’한 과거의 단편적인 사실事實들로 비추어질 수도 있는 하이퐁과 한국인의 교류 양상은 현재까지 알려진 것 이상의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양적으로 혹은 질적으로 내포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 자료 이외의 다양한 출처의 문헌들을 검토할 수 있게 된다면, 동아시아 해양 네트워크에서 작동하고 있던 하이퐁의 역동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아울러 한국 사회가 바라보는 하이퐁의 ‘현재적 의미’는 현재에 의미 있어 보이는 개별적인 현상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과거와의 총체적인 연속성에서도 규명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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