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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문화재 이야기 ⑩ 인천세관 舊창고와 부속동

2021-10-05 2021년 10월호


밀수 단속, 관세 부과부터

왕실 자금 관리, 기상 관측까지 한

 ‘작은 정부’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2021년 9월 인천세관 구창고 모습. 1911년 지은 건물로 최근 인천세관역사관으로 부활했다.


수인선 신포역 2번 출구를 나오자 ‘인·천·세·관·역·사·공·원’이란 글자가 가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글씨 뒤 인천항 방면을 바라보니 고풍스러운 건물 2개 동이 눈에 들어온다. ‘인천세관 구창고와 부속동’이다.
신포동을 등지고 인천항 방면으로 왼쪽 건물은 인천세관 ‘구창고’이고 오른쪽 ㄱ자 건물은 ‘부속동’이다. 창고는 1911년 지은 붉은 벽돌 건물이다. 수인선 공사를 할 때 본래 있던 자리에서 항구 쪽으로 40m 떨어진 곳에 옮겨 복원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됐다. 현재 내부를 ‘인천세관역사관’으로 꾸미는 중이다. 옆 부속동은 1918년 건축한 것으로 선박 관리 업무를 보던 구‘선거계’와 화물 관리 업무를 보던 구‘화물계’ 사무실이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569호’인 이 건물들은 인천항 개항과 근대 세관·관세 행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항만 유산이다. 인천시와 인천세관은 조만간 인천세관역사공원 개장식을 가질 예정이다.
세관은 개항기 중요한 공적 업무를 수행한 관청이다. 당시 세관은 관세 부과와 밀수 단속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행정을 집행한 ‘종합 행정’ 기관이자 ‘작은 정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변변한 행정기관이 없던 시절 인천항의 전반적인 관리에서부터 밀수 사범 체포와 조사, 왕실 자금 관리, 기상 관측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업무를 처리한 것이다.
인천세관의 첫 이름은 ‘인천해관’이었다. 1883년 인천이 개항하면서 인천해관이 함께 문을 연다. 당시 직원들은 모두 외국인들이었다. 인천해관엔 영국인 세무사 스트립플링(Alfred Burt Stripling)을 비롯해 독일, 프랑스, 미국, 청나라, 이탈리아 등지 출신의 직원 9명이 근무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관 직원인 홍우관(1866~1910)이 입사한 때는 1884년이다. 17세이던 1883년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해 영어 공부를 한 홍우관은 이때 해관에 입사했지만 월급은 외국인들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처우를 받았다.
인천해관은 처음 지금의 항동1가에 있었으나 이후 세 차례 이전했고, 지금의 제1부두 앞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됐다. 창고와 부속동은 전쟁 통에서 살아남은 건물들이다.
인천세관 창고를 등지고 신포동 방면 건너편 한국씨티은행(1층) 건물은 인천상공회의소와 옛 경기은행이 공동 소유하던 건물이었으나, 경기은행이 한미은행(현 한국씨티은행)에 합병되면서 인천상의가 소유권을 갖고 있다가 ‘대주중공업’에 매각했다.
인천세관 창고에서 신포동 방면 대각선의 유니클로 매장이 들어선 자리엔 본래 ‘국일관’이란 꽤 유명한 극장식 나이트클럽이 있던 곳이다.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중장년층까지 좋아했던 국일관은 1983년 문을 열어 2010년까지 운영됐으나, 이후 갈비탕을 전문으로 하는 ‘봉희설렁탕’으로 바뀌었다. 
머잖아 인천세관역사공원이 문을 열면, 얼마 전 ‘인천시민愛집’으로 재탄생한 옛 인천시장 관사, 열린 문화 공간으로 부활한 제물포구락부를 품은 근대건축물 탐방 코스,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와 어우러져 훌륭한 문화관광자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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