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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하늘도 감동한 오읍약수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1563
1232년, 몽골군대가 이 땅을 침략하였을 때 고려 고종 임금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정부를 강화도로 옮겨 끝까지 싸우고자 하였다. 장맛비를 맞으며 강화도로 들어온 고종 임금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언제 있을지 모르는 몽골군의 침입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여봐라, 몽골군은 잔인하기로 소문난 군대다. 우리가 이곳에서 그들을 막아내야 한다. 우선 궁궐을 보호할 수 있는 내성(內城)을 가장 먼저 쌓도록 하라.”
고종의 명에 따라 궁궐과 성곽을 쌓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관리들은 우선 임금이 거처할 궁궐의 자리를 잡기 위해 자신들이 떠나 온 개경의 궁궐이 있던 곳과 비슷한 지형을 찾아 나섰다. 그리하여 현재 고려궁 터가 있는 북산(北山) 밑을 새로운 궁궐이 들어설 자리로 정했다. 그리고 산 이름 북산도 개경의 궁궐이 있던 산, 송악산(松嶽山)으로 바꾸었다. 항상 개경을 잊지 않고 언젠가는 몽골 군대를 물리치고 개경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군인들과 강화도의 백성들이 함께 동원된 성 쌓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강화도로 피난 온 사람들로 인해 인구는 엄청나게 불어났고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 죽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거기에다 장마가 끝난 뒤 전염병이 돌아 여기 저기서 병으로 죽는 사람까지 있었다. 더구나 성을 쌓을 때는 한창 가뭄이 계속되던 때였다.
성 쌓기에 동원된 사내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가뭄 때문에 부족해진 물을 구하는 일이었다. 목이 말라 성 쌓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때 나이 든 한 병사가 말했다.
“여러분! 이렇게 목이 말라 쓰러지는 사람까지 생기는데 그대로 하늘만 쳐다보면서 힘든 일만 할 수는 없습니다. 기우제라도 지내 봅시다. 우리의 정성에 따라 하늘도 가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옳소. 그렇게 합시다.”
“왜 일찍 그런 생각을 못했지?”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지친 목소리로 그러나 간절하게 기우제를 올리자고 했다. 공사 감독이 부하 병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여봐라, 군관. 자네는 어서 창고에 가서 제사 지낼 음식을 가지고 오고 나머지 사람들은 송악산 꼭대기에다 제단을 차려라.”
모든 사람들이 송악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리고 모두 제단 앞에 꿇어앉았다. 공사 감독이 하늘을 향하여 제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송악산 신령님께 엎드려 비옵나이다. 고려 왕조가 나라를 연 후 저희들은 가장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이 있는 데다 요즘은 심한 가뭄으로 물 한 방울 구경하기 어렵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 송악산 신령님, 부디 단비를 내려 주시어 저희들을 굽어살피소서.”
제사가 끝나 갈 무렵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 소리가 들려 왔고 멀지 않은 곳으로 벼락이 떨어졌다. 그리고 쾅 쾅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 왔다. 사람들은 놀라 벼락이 떨어진 곳으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커다란 바위가 깨져 있었고 거기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와! 와! 물이다.”
“송악산 신령님이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보살펴 주셨다.”
사람들은 서로 얼싸 안고 둥실둥실 춤을 추었다. 그리고 힘을 얻은 군사들은 무사히 성곽을 쌓을 수 있었다.
이 약수는 몽골군 때문에 이곳으로 피난 온 사람들의 향수를 달래는 곳이 되었다. 이때 고향을 그리는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절하였던지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신(神)이 울고, 임금이 울고,그리고 온 강화 백성들이 울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다섯 오(五)’,‘ 울 읍(泣)’자를써서, 이곳을 오읍(五泣)약수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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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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