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원(趙明元)
기본사항 | 인물카드에는 趙壽童(조수동)이란 이름으로 등록됨. 1901년 7월 2일생으로 본적과 주소는 京畿道 富川郡 龍游面 南北里(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남북리) 868번지이며, 출생지는 京城府 麻浦洞(경성부 마포동) 249번지임. 직업은 농업이며 키는 167cm정도임. 신분은 양반임. 판결문에 조수동의 주소, 생일과 같은 인물로 조명원이 나오고, 인물카드에도 조명원 아래 조수동이라 쓰여 있어 조수동은 조명원의 별명으로 생각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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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행적 | 1919년 7월 19일 보안법 위반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1919년 9월 27일 기결수로서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20년 6월 26일 만기출소함(지문번호 33346/34446). | |
기타사항 | 판결문에 따르면 “피고 조명원은 조선독립운동의 거사에 찬동하여 정치변혁의 목적으로 그가 거주하는 동리에서도 역시 같은 운동의 기운을 빚어 내려고 꾀하여 대정 8년 3월 23, 4일 경 먼저 피고 조종서와 서로 만나고 이어서 피고 최봉학·문무현을 불러 그의 의도를 알려 일을 의논한 바, 동 피고들은 곧 이에 동의하여 그 날로 전기한 피고 명원 집의 하인 방에서 위의 운동 방법에 대하여 비밀히 모의한 끝에 피고들의 1단을 혈성단(血誠團)이라 이름하고 동월 28일을 기하여 거사하도록 의논이 결정되어 사들인 무명 천으로 대형의 구한국기 1류(증 제2호의 1)를 만들고, 또한 그기에 “혈성단 주모(자) 조명원·조종서·문무현·최명교(崔明敎[최봉학의 별명])”라 크게 쓰고, 다시 피고 명원의 문안에 피고들 4명의 글씨로 ‘조선독립운동을 거사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는 취지를 기재한 격문 80여통 및 신서 1통(증 제3호)을 작성하여 이를 봉투에 넣어서 피고 4명이 분담하여 그 날로 동면 남북리·거잠리(巨蠶里)·을왕리·덕교리의 문자를 해득하리라 생각되는 이민들에게 배부, 조선독립시위운동에 참가하도록 선동하여 두었다가, 동월 28일이 되자 동면 관청리 광장으로 가서 앞서 만들어 두었던 구 한국기를 떠 받들고서 피고들 4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매, 이에 호응하여 전부터 선동하여 두었던 자·기타 150여 명의 이민들이 집합하고, 또한 전부터 통모하여 두었던 결과 같이 참가한 피고 이난의가 인솔하는 1단과 합류하여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외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고,”라함. 독립운동사 제2권 : 삼일운동사(상) 제3장 경기 서부지방 제2절 부천군에는 조명원이 주도한 용유면의 만세운동을 다음과 같이 서술함. “용유면(龍遊面) 남북리(南北里)에 사는 조명원(趙明元)·조종서(趙鍾瑞)·최봉학(崔鳳鶴)·문무현(文武鉉) 등은 3월 23일과 24일에 모여 독립운동의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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