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기사
- 도시와 사람의 시간, 인천의 마음을 읽다
유동현의 고소한 밀담 ⑤
밀가루 한 포대
삶의 불씨 되다
전쟁은 사람들의 고향을 빼앗았고, 가난은 하루 세 끼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그 시절 밀가루는 한 끼의 식량이자 다시 일어설 밑천이었다. 포화가 휩쓸고 난 후, 밀가루는 작은 빵집의 시작이 되었고, 인천 섬의 소금이 되었다. 하지만 바다가 얼어붙으면 밀가루도 멈췄다. 구호와 나눔, 그리고 피란민들의 땀과 눈물. 쓰고도 질긴 삶이 한 포대의 밀가루에 담겨 있다.
글. 유동현 (前 인천시립박물관장)


1951년 미국으로 출국하는 장면 대사 (오른쪽 두 번째)

대전 성심당 초창기 모습
‘밀가루 신자’ 덕에 급증한 천주교인
1950년 12월 23일 피란민 1만 4,500여 명을 태운 미국 선박 한 척이 함경남도 흥남부두를 떠나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그중 한 가족이 거제와 진해 등을 전전하며 빈궁한 생활을 이어오다가 1956년 늦여름 서울행 기차에 오른다. 서울에 가면 어떻게든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약 5시간 동안 서울을 향해 달리던 열차는 대전역에 정차했지만 이후 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고장으로 멈춘 기차는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 가족은 열차에서 내려 대전역 인근에 있는 대흥동 성당을 찾아갔다. 성당에 있던 신부에게 가족이 처한 상황을 전하고 도움을 청했다. 신부는 밀가루 두 포대를 내줬다. 그 피난민 가족은 이 밀가루로 찐빵을 만들어 대전역 앞에 천막 노점을 치고 팔기 시작했다. ‘빵지 순례의 성지’ 성심당聖心堂의 시작이었다.
그들이 받은 밀가루는 미국 가톨릭 신자들이 보내준 구호물자였다. 우리나라는 1945년 9월부터 미국에서 보내준 식품, 의류, 의약품 등을 원조받았다. 미국 공법 480호에 따라 1956년부터 받은 구호물자 중 밀가루는 흔히 ‘악수표 밀가루’로 불렸다. 포대에 태극기와 성조기 아래 악수하는 두 손이 인쇄돼 있었기 때문이다. 공법 480호 원조는 1981년에 종료됐다.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는 해외 원조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51년 8월 정부가 집계한 피난민은 380만 명, 집과 재산을 잃은 전재민戰災民은 402만 명으로 모두 782만 명에 달했다. 남한 인구 절반에 가까운 수치였다.
당시 주미 대사였던 가톨릭 신자 장면(요한, 1899~1966)은 미국의 가톨릭교회에 한국을 위한 기도와 원조를 부탁하는 호소문을 보냈다. 가톨릭 신자들은 전쟁 피해자들에게 보낼 기부금을 걷었고 밀가루를 구입할 기금과 구호 물품을 수집해 한국으로 보냈다.
4·19민주혁명 후 초대 내각제 총리가 되는 장면은 ‘인천인’이다. 1899년 서울 적선동에서 태어난 후 부친 장기빈의 직장으로 인해 인천과 인연을 맺는다. 그의 부친은 1894년 인천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갔다가 외국인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는 ‘외국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이듬해 한성외국어학원에 들어간다. 영어를 익힌 장기빈은 이후 제물포 해관(지금의 세관) 직원으로 임용된다.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자 사직한 후 미국 스탠더드 오일 인천대리점, 영국 런던에 본점이 있는 타운센트 무역상 인천지점 등에서 일한다.
장면은 1906년 인천 박문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접하게 된다. 아홉 살 때 머리 땋고 학교에 가기 싫어서 부모님 승낙도 없이 때마침 인천에 처음 생긴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싹둑 잘라 버린 일화도 있다.
장면 대사의 강력한 호소는 미국 가톨릭계를 움직였다. 가톨릭 주교회의복지협의회(NCWC), 가톨릭 구제회(CRS) 등이 한국을 돕기 위해 나섰다. 미국에서 건너온 구호품은 전국 각지로 분배되었다. 모인 물품의 90%는 양곡이었다. 밀가루를 비롯해 옥수수 가루, 우유가루는 전국의 학교와 무료 급식소 등으로 보냈다.
각지의 성당에도 구호 물품이 배급되었다. 아무래도 신자들 위주로 나눠주다 보니 구호품을 받기 위해 입교하는 이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1950년대 한국 천주교의 연평균 신자 증가율은 16.5%에 달했다. 1953년 남한의 신자 수는 17만 명 정도였다. 휴전 이후 신자 수는 해마다 가파르게 증가해 1962년에는 53만여 명을 기록했다. 사람들은 구호품 때문에 믿음 없이 신자가 되는 이들을 ‘밀가루 신자’, 그 성당을 ‘밀가루 교회’라고 불렀다.
당시 인천의 대표적인 ‘밀가루 교회’는 송림동성당이었다. 성당 위쪽 수도국산에는 6·25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란민들이 모여 살았다. 어느 날 이웃집 천주교 신자가 성당에서 구호품을 받아 오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너도나도 성당으로 달려 내려갔다. 사람들은 구호품을 받기 위해 세례를 받고 ‘밀가루 신자’가 되었다.
1955년 설립된 제물포구의 송림동성당은 이듬해인 1956년 성당 건물을 완공했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 이희태가 설계한 작품으로,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입방체를 바탕으로 한 근대적 성당 건축을 시도한 이희태의 작업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혁신적이었다.
성당 주변에는 작은 도시형 한옥들이 다닥다닥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주변 풍경을 의식한 듯, 모던한 외벽에 리듬감 있는 창호를 배치하고 서로 다른 재료를 조합해 벽면을 여러 단위로 나누었다. 단순한 입방체에 변화와 깊이를 더한 것이다. 성당은 주변의 오래된 기와집들과 대조를 이루면서도, 그 틈에서 자신만의 건축적 표정을 드러냈다.

송림동성당 모습

1959년 3월 16일 자 경향신문
소금을 만든 실향민 밀가루
가톨릭의 구호품은 ‘밀가루 신자’만 양산해 낸 것은 아니다. 영종도 염전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실향민’이다. 6·25전쟁 이후 영종도에는 바다를 통해 피난 온 황해도 지역의 실향민들이 많이 정착했다. 1954년 정부는 피란민 정착사업의 하나로 영종도에 제방을 쌓고 염전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바닷물을 가두어 소금을 생산하고, 이를 생계 수단으로 삼도록 하려는 목적이었다. 원료도 기계도 필요 없었다. 몸뚱이만 있으면 되는 사업이었다.
이때 큰 힘이 된 것이 천주교구제회의 손길이었다. 그 내용이 『경향신문』 1959년 3월 16일 자에 ‘永宗島(영종도)서 再生(재생)의 길 얻은 避難民集團(피난민집단)’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그 기사 내용을 간추려 본다.
‘1·4 후퇴 당시 이북 땅인 황해도 옹진, 연백, 송화 등지에서 무작일체 알몸으로 빠져나온 피난민 228세대, 총 1,305명이 영종도(당시 부천군 영종면 운서리)로 흘러들어왔다 처음에는 몇 개의 천막에 의지한 채 풀잎을 따서 삶아 먹거나 나무껍질을 벗겨 먹을 정도로 형언할 수 없는 비운 속에서 연명했다. 1956년 5월부터 천주교구제회와 보건사회부가 본격적인 구호를 시작하여 세대 당 한 달에 밀가루, 옥수수가루 7두입(포) 정도의 구호양곡과 의류를 지원받아 겨우 목숨을 이어갔다. 피난민들은 ‘서해도서 철수난민영종조합’을 결성하고, 피난민 전원이 삽과 괭이를 들고 바닷가로 나가 2,000m(2km)에 달하는 제방을 쌓아 거대한 염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염전 완성을 위해 1년 동안 피와 땀을 흘려 쌓아 올린 공든 탑이 작년(1958년) 여름 두 차례의 강력한 폭풍과 풍랑에 휩쓸려 하루아침에 완파되는 절망적인 시련을 겪었다. 피난민들은 다시 뿔뿔이 헤어질 위기에 처했으나 천주교구제회의 지속적인 지원에 힘입어 다시 둑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피난민들의 눈물겨운 노력 끝에 총 67정보(약 66만㎡) 규모의 염전 중 약 70%가 완성되고 남은 30%의 완성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염전 축조 공사는 기계 하나 없이 오직 인력으로만 진행된 고된 작업이었다. 출역 일수(일한 날짜)를 적은 장부를 들고 가 배급소에서 밀가루를 타 오는 날은 온 가족이 오랜만에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날이었다.
이 밀가루 배급을 동반한 축조 사업 덕분에 영종도와 용유도 일대에는 금홍염전, 동양염전 등 수많은 천일염전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특히 삼목도에 있던 염전은 ‘정착지 염전’이라고 불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영종도 지역에만 무려 29곳의 염전이 운영되었다. 그 면적이 약 300정보에 이르렀다. 국제 규격 축구장의 400개가 넘는 면적이다.
한동안 우리나라의 중요한 소금 생산지로 번성하게 된 밑바탕에는 배급받은 밀가루 한 포대에 의지해 갯벌을 막아낸 피난민들의 피와 땀이 있었다. 1990년대 영종도 일대 4개의 섬(영종도, 삼목도, 신불도, 용유도)의 최대 경제 축은 ‘밀가루’가 바탕이 된 염전이었다. 인천국제공항 건설이 시작되고 주변이 매립되면서 대부분의 염전이 문을 닫게 된다.

인천의 염전

꽁꽁 얼어붙은 인천항

하역할 외항선의 밀가루
밀가루를 멈추게 한 인천항 결빙
가톨릭 신자들의 나눔도, 피란민들의 눈물겨운 노력도 날씨가 도와주어야 수제비라도 만들어 끼니를 이을 수 있었다. 혹한이나 태풍으로 원조 밀가루의 하역이 막히면, 가난한 사람들의 밥상부터 흔들렸다.
1963년 1월 24일. 인천항이 꽁꽁 얼어붙었다. 영하 20도 안팎의 강추위가 이어졌다. 1883년 개항 이래 80년 만에 인천항 전체가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였다. 한강 하류에서 밀려 내려온 거대한 얼음덩어리까지 항구에 몰려들었다. 연안에서 바다 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까지 얼음이 퍼져 얼어붙었다. 항만의 하역 작업은 멈춰 섰다.
당시 원맥을 실은 외항선들은 인천 앞바다 팔미도 부근에 정박했다. 작은 배들이 본선에 접근하면 선박에서 에어호스로 밀을 불어 넣어 실어 나르는 방식이었다. 바다가 얼어붙자 작은 배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얼음 두께가 30cm를 넘는 곳도 있어 일반 선박의 운항은 어려웠다.
밀가루가 들어오지 않자 비상이 걸렸다. 식량 수급에 차질이 생기고 곳곳에서 식량난이 벌어졌다. 인천측우소의 기상 담당자는 “날씨가 풀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취지로 난색을 표했다. 하늘이 풀어 주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끝내 군 당국이 나섰다. 긴급 식량을 하역하기 위해 해군 상륙함정인 LST 두 척을 동원했다. 얼어붙은 바다에서 식량을 들여오기 위한 비상작전이었다.
보름가량 이어진 혹한도 마침내 누그러졌다. 얼음이 녹기 시작하자 팔미도 앞바다에 줄지어 대기하던 외항선들의 하역 작업도 재개됐다. 그 시절 인천항으로 들어오던 밀가루는 단순한 구호물자가 아니었다. 바다가 열려야 도착하는 희망이었고, 누군가의 한 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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