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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인천의 얼굴들, 그들의 마음을 듣다

인천화교협회 주희풍 부회장 인터뷰···“화교의 역사는 곧 인천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작성일
2026-06-18

140년의 이웃, 차이나타운이 품은 인천의 시간

| 인천화교협회 주희풍 부회장 인터뷰


인천역 앞 차이나타운. 주말이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붉은 패루(牌樓) 아래를 지나간다. 사람들은 짜장면을 먹고, 삼국지 벽화 앞에서 사진을 찍고, 언덕길을 따라 자유공원으로 향한다. 많은 이들에게 차이나타운은 관광지다. 하지만 주희풍 인천화교협회 부회장에게 이곳은 조금 다른 의미다. “저는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의 말은 짧았지만 무게가 있었다. 골목 하나, 계단 하나, 오래된 건물 하나에도 누군가의 삶이 쌓여 있다. 화교협회 건물에 걸린 오래된 사진과 기록물들은 그 시간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화교의 역사를 이야기했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인천의 역사를 듣고 있는 듯했다.

인천화교협회 주희풍 부회장 ⓒ콘텐츠기획관

 
개항과 함께 시작된 인천의 국제도시 이야기

인천 화교 사회의 시작은 개항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82년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고, 1884년 청국 조계지가 형성되면서 화교들이 인천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당시 차이나타운은 단순한 외국인 거주지가 아니었다. 중국과 조선을 연결하는 무역과 건설업의 중심지였고,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국제도시 인천의 관문이었다. “지금의 송도나 영종이 국제도시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당시에는 차이나타운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개항기 인천은 동아시아 무역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과 일본, 홍콩의 물자가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고, 화교 상인들은 그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그 시절 차이나타운은 ‘중국가(中國街)’라 불리며 가장 활기찬 상업지구 가운데 하나였다. 주 부회장은 화교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늘 ‘인천’을 함께 이야기했다. “화교들은 인천과 떨어져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인천이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함께 살아왔습니다.” 그의 말처럼 화교의 역사는 곧 인천의 역사이기도 했다.


차이나타운은 관광지가 아니라 삶의 공간이다

차이나타운을 처음 찾는 사람들은 종종 영화 속 이미지를 떠올린다. 어둡고 폐쇄적이며 낯선 공간. 하지만 실제 골목은 전혀 다르다. 점심시간이면 식당마다 손님들로 북적이고, 골목에서는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누군가는 장을 보고, 누군가는 가게 문을 연다. 그곳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네다. 특히 화교협회가 자리한 영화가 골목은 차이나타운의 중심과도 같은 공간이다. 과거 청국 영사관이 있던 자리였고, 지금도 화교소학교와 중산중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인천화교협회 뒷뜰에서 보이는 중산화교학교 ⓒ콘텐츠기획관


“사람들은 차이나타운 하면 짜장면만 떠올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사실 이곳은 살아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는 관광객들이 보지 못하는 차이나타운의 진짜 모습이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어르신들이 시장을 보고, 이웃들이 서로 안부를 묻는 평범한 일상. 그것이야말로 140년 동안 이어져 온 차이나타운의 본모습이라는 것이다.


사라져서는 안 되는 이름, 호구를 지키는 일

화교협회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의외로 화려하지 않다. 바로 ‘호구(戶口)’를 관리하는 일이다. 호구는 단순한 행정문서가 아니다. 누가 누구의 후손인지, 어느 가문에서 태어났는지, 어떤 삶을 이어왔는지를 기록한 공동체의 역사다. 협회 건물 안에는 출생과 혼인, 사망이 기록된 오래된 호구 자료들이 보관돼 있다. 주 부회장은 이를 두고 "조상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화교들에게 호구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기록입니다. 조상을 증명하는 것이고, 우리의 역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는 화교협회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 일은 영원히 사라져서도 안 되고, 사라질 수도 없는 일입니다.” 사람은 떠나고 세대는 바뀌지만 기록은 남는다. 그 기록은 화교 공동체의 역사이자, 개항 이후 인천이 품어온 사람들의 역사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자산이다.


주희풍 부회장이 보여준 호구 자료 ⓒ콘텐츠기획관


한국도, 대만도 아닌 ‘화교’라는 이름

주 부회장은 자신을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화교 3세라고 소개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까지 모두 한국에서 다녔다. 한국어가 더 익숙하고, 인천 골목이 더 친근하다. 하지만 행정적으로 그는 여전히 외국인이다. “한국 사람 같지만 한국 사람은 아니고, 그렇다고 대만 사람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는 화교를 설명할 때 종종 짜장면 이야기를 꺼낸다. 중국에도 없고 한국에도 없는 음식. 하지만 분명 이 땅에서 만들어진 문화.  화교 역시 그렇다고 했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대만의 문화가 오랜 시간 섞이며 형성된 또 하나의 정체성.


“그래서 저는 화교가 한국 사회 안의 하나의 소수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특별한 대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화교가 가진 역사와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이해받기를 바란다고 했다.


전통과 변화 사이, 차이나타운의 내일

140년의 역사를 품은 차이나타운은 지금 새로운 갈림길에 서 있다. 관광객은 늘고 있지만, 공동체는 점차 작아지고 있다.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와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공존한다. 주 부회장은 차이나타운의 미래 역시 그 균형 속에 있다고 말했다. “전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는 차이나타운이 단순한 먹거리 관광지로만 소비되는 것을 경계했다. 짜장면 한 그릇으로 기억되는 공간이 아니라, 개항 이후 인천이 품어온 다양한 문화와 공존의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가 바라는 차이나타운은 과거에 머무는 박물관도, 무분별하게 상업화된 관광지도 아니다. 140년의 역사를 품은 채 새로운 세대와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다.


주희풍 부회장이 인터뷰를 하며 미소를 띄고있다.  ⓒ콘텐츠기획관


공존의 도시, 인천

인터뷰를 마치고 차이나타운 골목을 함께 걸었다. 주 부회장은 오래된 건물 하나, 학교 담벼락 하나에도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의 설명을 듣다 보니 차이나타운은 더 이상 관광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개항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건너와 정착하고, 살아가고, 서로를 이해하며 만들어 온 인천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차이나타운 골목을 걷다 보면 오래된 건물보다 먼저 사람들의 시간이 보인다. 140년 전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 낯선 땅에서 삶을 일구고, 학교를 세우고, 가게를 열고, 아이를 키웠던 사람들.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 오늘의 인천이 됐다. 주희풍 부회장이 지키고 있는 것은 단순한 화교 공동체의 역사가 아니다. 인천이라는 도시가 오랜 시간 품어온 공존의 기억이다.


그는 인터뷰 내내 화교를 이야기했지만, 결국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것은 인천이었다. “저는 인천이 좋습니다.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 순간 떠오른 것은 ‘화교’라는 단어보다 ‘인천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화교의 역사는 인천의 역사이고, 차이나타운의 역사는 인천의 역사다. 그리고 주희풍이라는 사람 역시 결국 인천이 만들어낸 한 사람의 이야기였다. 화교가 아니라, 인천 사람 주희풍. 그가 지키고 있는 것은 공동체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인천이라는 도시의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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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화교협회


인천화교협회 전경 ⓒ콘텐츠기획관


◎ 인천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형성된 화교 공동체를 대표하는 단체로, 화교 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교민 간 교류 및 교육 지원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 개항기부터 이어져 온 화교 사회의 기록을 관리하며, 화교학교 운영 지원과 각종 문화행사를 통해 지역사회와의 교류를 확대하고 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문의처 032-440-4122
  • 최종업데이트 202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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