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시민 행복 메시지 : 칼럼
# 두 뮤지션 이야기글. 임성훈 본지 편집장이번 호 에는 두 명의 뮤지션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전설 송창식과 아홉 번의 국제콩쿠르 우승을 기록한 클래식기타리스트 박규희입니다.세대도, 장르도 다르지만 이들 뮤지션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우선 이들은 인천 출신입니다. 그들의 음악에는 고향 인천이 스며 있습니다. 송창식은 중구 신흥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에 보낸 편지에서 신흥동의 긴 담 모퉁이, 노래 연습을 하던 해광사의 넓은 공터 등 음악의 씨앗을 키운 인천의 구석구석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실제로 ‘한번쯤’이라는 노래는 인천의 골목길에서 받은 영감을 토대로 만들었고, ‘담배가게 아가씨’도 실제 인천의 한 담뱃가게 앞 풍경을 회고한 노래라고 합니다.최근 인천시립교향악단과의 협연을 성공리에 마친 박규희 또한 “인천에서 살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이라며 고향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과시합니다. 그는 인천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자기 몸집보다 큰 기타를 메고 자유공원 꼭 대기를 오르내리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당시 그의 스승이었던 리여석 선생이 자유공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기타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도 자유공원의 언덕길과 즐겨 찾던 떡볶이집이 그대로 있어 너무 좋다고 합니다.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들이 혁신의 아이콘이라는 점입니다.송창식은 전성기 시절, 독특한 창법과 시적인 가사로 음악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한국적 정서를 살린 음악과 시대를 앞서간 주옥같은 곡들에서는 그의 실험정신이 묻어납니다.박규희는 더 나은 음색을 구
2025-08-12 2025년 8월호 -
광복절 특집 : 인천의 독립운동가
광복 80주년,조국의 품에 새겨진 이름들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속 11개의 얼굴어두운 현실에서도 빛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 이들.이들 외에도 인천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었다.QR코드를 스캔하시면인천보훈지청이 선정한인천의 독립운동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인천시청 앞 펄럭이는 태극기, 하루 방송을 종료하며 나오는 애국가, 그리고 매 학기 듣는 국어 수업. 별다른 것 없어 보이는 우리의 일상, 하지만 평범한 일상이 당연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당연한 일상을 꿈꾸는 것조차 위험했던 시절, 그 어둠 속에서 당연한 하루를 되찾기 위해용기 낸 이들이 있다. 누군가는 학생이었고, 누군가는 농민이었으며 잡화상이었다.그저 평범했던 그들. 그들의 용기와 희생 덕분에, 1945년 8월 15일. 이 땅에 큰 함성이 울려 퍼졌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목청이 뜨거워지도록 외치던 그 말. 80년이 지난 오늘, 다시 한번 외쳐본다.그날의 함성을 다시 새기며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한 11명의 인천 독립운동가를 만나보자.글. 윤은혜 본지 편집위원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자료. 인천문화재단이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에서 체포 또는 재판 당시 거주지가 현재 인천광역시 관내에 해당하는 인물의 카드를 선별한 것입니다. 더불어 독립운동과 관련한 죄목인 ‘소요’, ‘보안법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사례만 대상으로 하였습니다.김명진김명진은 3.1 운동 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의 동맹 휴가를 이끈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1902년 10월 9일생으로 검거 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3학년생이었다. 본적지와 주소는 인천부 내리 152번
2025-08-12 2025년 8월호 -
인천에서 인천으로 : 인천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20주년
멈추지 않는 함성,폭우를 뚫고깨어난 여름펜타포트 20년, 록의 전설이 되다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인천시립박물관2025 인천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바로가기대한민국 인천에 펼쳐진 펜타포트의 바다.20년의 뜨거운 열기가 이 도시를 다시 깨운다.1999년, 트라이포트에서 시작된 함성.쏟아지는 폭우 속 빛나던 순간이 전설의 시작이었다.역사의 시작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폭우가 무대를 집어삼켰다. 드럼 헤드에 맺힌 물방울이 터질 때마다 스네어 소리가 더 날카롭게 갈라졌다. 젖은 기타 줄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뜨거운 조명을 받아 허공으로 흩어졌다. 관객들은 우비를 벗어 던진 채 진흙 위에서 발을 굴렀다. 빗줄기가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함성이 비를 찢고 하늘로 치솟았다.1999년 여름, 인천 송도의 한 공터.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Triport Rock Festival의 첫날이었다. 전설의 록 밴드 딥 퍼플Deep Purple은 악천후 속에서도 끝내 무대에 올랐다. 기타의 묵직한 리프가 공기를 가르자 ‘스모크 온 더 워터Smoke on the Water’가 폭우를 뚫고 울려 퍼졌다. 그 순간 터져 나온 함성이 하나의 거대한 합창처럼 폭발했다.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이 땅의 록은 처음으로 세계와 맞닿았다. 그해 유례없는 폭풍우가 몰아쳤지만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폭우는 끝내 무대를 무너뜨렸다. 둘째 날 공연은 전면 취소됐다. 그러나 관객들은 끝까지 빗속에 서서 무대를 바라보았다. 기록적인 실패라 불렸지만, 그날의 함성은 멈추지 않았다. 쏟아지는 폭우가 대한민국 록의 심장을 처음으로 거세게 뛰게 했다.실패가 만든 위대한 서사김학선 음악평론가는 그날을 지금도 선명히 기
2025-08-12 2025년 8월호 -
길 위의 인문학 : 광복절
뼈아픈 교훈으로현재에 되새기고 미래에 남겨야 할 역사글. 김성배 문화비평가인천 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는 아픔과 모멸의 슬픈 역사를 청산하고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하고 전쟁 반대 평화 수호의 기치를 드높이기 위해 소녀상을 건립하여 2016년 10월 29일 제막식을 가졌다.(동상 김창기 작가)일제강점기 징용노동자상 인천건립추진위원회는 소녀상이 세워진 이듬해인 8월 12일 동상을 건립했다. 작가는 실제 조병창을 경험한 두 인물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이원석, 해방의 예감, 3m*4m*2m, 청동과 화강석)“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해마다 8월 15일이면 이 노래를 진지하고 비장하게 부르곤 했다. 일제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해 역사를 지켜낸 선열들의 희생으로 국권을 회복하고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한 지 어느덧 80년의 세월이 흘렀다.부평공원에는 소녀상과 징용노동자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 일대는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삼릉)제강과 노동자들의 숙소인 줄사택(10가구를 이어 붙인 형태)이 있었던 곳이다.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다음 해 4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1939년 부평에 조병창을 설치해 무기 제조와 군수물자 보급을 담당케 했다. 미쓰비시는 1942년 같은 일본기업으로부터 공장과 숙소를 인수했다. 계속해서 일제는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촉발된 태평양전쟁을 치르기 위해 더욱 가혹하게 강제징용과 동원, 물자약탈 등을 일삼았다. 조선인은 한반도 내에서는 물론 일본, 사할린과 쿠릴열도, 동남아시아 등지로 끌려가야만 했다.유네스코는 2015년 7월 메이지 시대(1868~1912)의 산업혁명유산으
2025-08-12 2025년 8월호
- 자료관리담당자
-
-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2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