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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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특집-과거와 대화하는, 인천창영초등학교
과거와 대화하는, 인천창영초등학교
- 과거와 대화하는 현재의 학교-
개교기념일 11년 앞당겨져- 왜곡된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이 맺은 결실과거와대화하는학교SINCE 1896 - 2024‘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의 저자 에드워드 카가 역사에 대해 내린 정의다. 인천창영초등학교는 이 정의에 가장 걸맞은 학교다. 100년 넘는 세월을 관통한 이 학교는 지금도 과거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그 대화가 오가던 중에 최근 학교의 역사가 바뀌었다.글 임성훈 본지 편집장.사진 안영우 포토디렉터창영초등학교는 오는 3월 20일 의미 있는 현판식을 앞두고 있다. 학교의 역사를 11년 앞당기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현판식이다.원래 창영초교의 개교일은 1907년 5월 6일로 알려져 있었다. 1906년 공포된 보통학교령에 따라 1907년 설립된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창영초교의 출발점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3월 20일 학교에 새로 부착될 현판에는 개교기념일이 1896년 1월 22일로 새겨진다.이로써 창영초교는 ‘인천 3·1운동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지위에 더해 ‘인천지역 최초 공립초등학교’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된다. 현재 인천 최초 공립초교는 1896년 4월 1일 개교한 강화초교로 알려져 있다.사실 그동안 학계와 교육계 안팎에서는 창영초교의 개교 시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조선이 1895년 공포한 ‘소학교령’을 근대 초등교육의 시작으로 인정하지 않은 점 등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낀 뜻있는 연구자들에 의해 역사의 가려진 부분이 베일을 벗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창영초교의 개교 시기가 처음 공론화된 것은 ‘대한제국시대 인천 공립초등교육과2024-03-05 2024년 3월호 -
땅 이름 이야기-남동南洞·남동구南洞區
우리가 밟고 선이 땅 위의 이름들
南洞세 번째 땅 이름[남동·남동구]
인천 남동구는 남동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인천에 중·동·서구처럼 방위方位에 따른 구區 이름이 많다 보니 남동구도 ‘南東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남동구의 남동은 ‘南洞’이다. 이 지역은 구한말에 남촌면南村面과 조동면鳥洞面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4년 일제日帝가 전국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이 두 이름에서 각각 ‘南’과 ‘洞’을 따서 이름을 만들었다. 이처럼 남동은 남촌南村과 조동鳥洞에서 생긴 이름인데, 이들은 무슨 뜻일까.먼저 남촌은 ‘관아官衙의 앞(남쪽)마을’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인천의 행정 중심 기관이었던 인천부仁川府 관아가 지금의 미추홀구 관교·문학동 일대에 있었으니, 관아를 기준으로 이곳은 대략 그 남쪽에 있는 마을이었다.그런데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남쪽을 앞으로, 북쪽을 뒤로 여겼다. 우리 민족 주류主流의 선조들이 먼 옛날 시베리아 일대에서 한반도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는데, 북쪽 지방에서 남쪽으로 계속 앞을 보고 내려왔기에 남쪽이 앞, 북쪽은 뒤가 된 것이다. 조선 중종 때 최세진이 지은 한자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 ‘南:앞 남, 北:뒤 븍(북)’이라 설명해놓은 것으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한 지역의 중심지를 기준으로 남쪽에 있는 마을은 앞마을이라 불렀고, 이를 한자로 바꾸면 남촌이 된다.조동은 우리나라 땅 이름에 흔한 ‘새말’을 한자로 바꾼 것인데, 이는 ‘새’라는 우리말 단어 때문에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된다. ‘두 지역 사이(새)의 마을’, ‘새로 생긴 마을’, ‘ 새가 많은 마을’, ‘2024-03-05 202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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