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스케치에 비친 인천 ⑤ 월미도
지금, 아름다운 날들‘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최수동 화백이 그린, 추억 너머 오늘 아름다운 날들로 빛나는 월미도다.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 월미도 대관람차 53x45.5cm Oil on canvas 2021오월 찬란한 햇살 아래 월미도.멀리서 대관람차를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설렌다. 우리들의 바닷가 놀이터아, 이름도 정겨운 월미도月尾島. 1990년대 초 햇살 좋은 이맘때면, 엄마 아빠 손잡고 나들이 온 아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하늘에 걸린 대관람차는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기구를 타고 공중으로 높이 솟아오르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지구에서 가장 무서운 놀이기구’ 바이킹에 겁 없이 올라탔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전설의 놀이기구 ‘타가다 디스코’는 그때도 빙글빙글 잘도 돌아갔다. 그 위에서 수건돌리기를 하고 텀블링도 하며 놀았다. 옆 무대에선 언니 오빠들이 디스코 음악에 맞춰 손가락 찌르기를 했다. ‘까르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와 즐거운 비명소리. 바닷가 놀이터에선 어른도 아이도 모두 신이 났다. 30년 월미도 테마파크를 지킨, 원조 디스코 디제이 유병수 이사“인천 하면 월미도였죠. 사람들로 터져 나갈 듯했어요. 주말이면 하인천역까지 차가 길게 줄을 섰습니다.” 월미도 테마파크 유병수(61) 이사는 월미도 테마파크 ‘마이랜드’가 문을 연 1992년 그
2021-05-01 2021년 5월호 -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⑫ 인천하늘고등학교
인천, 하늘로 날다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열두 번째 등굣길은 하늘길, 착륙지는 공항 품은 영종도에 자리한 인천하늘고등학교다. ‘꿈 그리고 열정’이라는 교훈처럼, 하늘 닮은 원대한 포부와 뜨거운 가슴으로 더 큰 세상을 향해 가는 그 길을 스무 살 새내기 박채연(8회 졸업), 김윤서(8회 졸업) 학생과 함께 걸었다.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전국에서 벤치마킹을 하기 위해 방문할 정도로 쾌적한 환경과 탁월한 인프라는 인천하늘고등학교의 자랑이다.인천에 의한 인천을 위한 인천의 학교‘인천에는 좋은 학교가 없다.’ 1년에도 600~700여 명의 학생들이 그들만의 좋은 학교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백년대계百年大計라 했다. 이대로라면 인천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채욱 당시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과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절실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가 발 벗고 나섰다. 공항을 일터로 둔 이들의 정주 여건 개선이 곧 인재를 잡는 길이었다. 지용택(84) 이사장은 도움 될 만한 곳을 모조리 찾아다니며 인천의 인재는 인천이 키워야 한다고 외쳤다. 인천시와 교육청도 힘을 보탰다. 2011년 3월, 인천하늘고등학교(이하 하늘고)가 개교했다. 인천 최초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의 탄생이었다.“이채욱 전 사장께서 2년 전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얼마나 학교를 사랑하는 분이셨는지, 1억원이라는 큰돈을 장학금으로 남기셨다고 해요.”그는 떠났지만 늘 학교와 함께한다. 학교는 이채욱 전 사장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교정 가
2021-05-01 2021년 5월호 -
인천 문화재 이야기 ⑤ 홍예문(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9호)
115년 전 조선인 피땀으로 건설한 중구와 동구의 소통길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2021년 4월 중순, 봄비가 내린 뒤 중구 방향에서 바라본 홍예문 전경이쪽에서 가던 차가 입구에서 잠시 멈추자 저쪽에서 차가 넘어온다. 반대편 차선의 차가 완전히 지나가자 멈춰 있던 차가 비로소 출발한다. 차끼리 기다려주기도 하고 사람과 차가 서로 양보를 하기도 한다. ‘홍예문’(인천시 중구 송학동2가 20)은 그렇게 서로에게 길을 내어주며 115년 세월을 지나왔다. 신포동과 동인천, 중구와 동구를 잇는 홍예문의 홍예虹霓는 ‘무지개’ 혹은 ‘아치’란 뜻을 지닌다. 폭 4.5m, 높이 13m의 홍예문은 작은 터널이라고 할 수 있다. 터널을 뚫기 시작한 시기는 1906년이다. 러일전쟁(1904)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인의 수는 6,000명 정도였다. 그런데 2년 만에 두 배가 넘는 1만3,000여 명의 일본인이 모여든다. 일본은 자국민을 분산시키기 위해 지역을 확장할 궁리를 짠다. 신포동 방면에서 동구 만석동이나 동인천역으로 넘어갈 때 화평동이나 내동 쪽으로 빙 둘러서 가지 않고, 직접 넘어가는 길이 필요하기도 했다. 방법은 중구와 동구의 경계에 있는 응봉산을 뚫는 것이었다.1906년 뚫기 시작한 홍예문 건설은 1908년 완공한다. 문제는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이 대부분 조선인 노무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발파기도 없이 조선인들은 곡괭이 같은 원시적 도구로 거대한 암벽을 부수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조선인 노무자들이 죽거나 다쳤다.암벽이 사라진 자리에 쌓기 좋게 다듬은 화강암이 들어갔고 천장은 빨간 벽돌로 마감했다. 일본인들은 홍예문을 구멍이라는 뜻의 아나문(穴門)으
2021-04-30 2021년 5월호 -
인천소사-1982.05.22
인천소사1982.05.22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탑 기공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탑은 인천상륙작전의 의의를 되새기고, 한국과 미국의 상호 신뢰와 우호 협력 관계의 지속적 발전과 전진을 위해 옛 존스턴 별장 자리에 건립됐다. 1882년 있었던 한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을 기념하기 위해 100주년이 되는 1982년에 세워져 그 의미를 더했다.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탑은 응봉산 꼭대기 가장 높이 자리하고 있다. 거대한 삼각형 여러 개가 각기 다른 위치에서 한 지점을 바라보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돛을 형상화해 인간과 자연, 평화, 자유를 상징하는 8개의 탑으로 구성된 것이라 알려져 있다.그때, 5월의 인천은…1936. 05. 16 수인선 기공1952. 05. 05 제1회 인천시의회 개회1974. 05. 10 인천항 제2도크 준공, 인천시민회관 준공1975. 05. 09 인천실내체육관 준공1982. 05. 18 부평도서관 개관1982. 05. 20 인천노인복지회관 준공1986. 05. 31 새얼문화재단, 제1회 새얼백일장 개최(송도 유원지)2010. 05. 02 제3경인고속도로 개통
2021-04-30 2021년 5월호 -
소소한 인천사-인천지명
우물이 많던 동네 ‘열우물’흔히 부평구 십정동을 ‘열우물’이라고 한다. 그 유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크게 세 가지 설이 전해진다. 첫 번째, ‘십정十井’을 열 개의 우물 또는 열 개가 넘는 우물로 해석하는 경우다. 이는 가장 일반적인 설로, 마을에 열 개의 우물이 있어 십정이라 불렸다는 것이다. 다만, 우물이 정확히 열 개라기보다는 열 개가 넘을 정도로 많았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실제 마을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상십정리라 불리는 윗열우물마을에만 해도 수십여 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매몰되거나 도로가 나 없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두 번째는 ‘열熱’이 많이 나는 우물이 있어서라는 설인데, 이를 한자로 옮길 때 잘못 표기해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현재 상정초등학교 인근에 온 동네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큰 대동우물이 있어 물 양이 많고, 아무리 추워도 물이 따뜻해 열이 많이 나는 우물이 있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마지막은 우물과 관계없이 이 동네의 산맥이 ‘십十자’로 교차한 모습을 하고 있어 십정十丁이라 했는데, 나중에 십정十井으로 변했다는 설이다. 북쪽 계양산 남쪽 줄기인 원적산과 동쪽 소래산 산맥이 주안산에 이르러 이 마을에서 교차하는 형세여서 대정大丁도 생기고 십정十丁도 생겼다는 설이다. 제각각 나름의 근거를 갖고 있기에 열우물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단정 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열우물이라 불리는 십정동은 ‘열 개의 우물이 있는 마을’을 의미하는 ‘열우물’로 불리고 있고, 이에 대해 주민들이 공감하며 사용하고 있기에 앞으로 더욱 고착화
2021-04-30 2021년 5월호 -
인천의 아침-5·3항쟁 35주년, 인천의 봄
5·3항쟁 35주년, 인천의 봄지금은 시민공원이 된 옛 인천시민회관 광장은 ‘대통령 직선제’와 ‘언론 자율화’를 이끌어낸 ‘6월 항쟁’의 불씨 ‘5·3항쟁’(1986년 5월 3일)이 전개된 역사의 현장이다. 시민회관 광장 5·3항쟁 기념석 뒤로 시민들이 오가고 있다.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독재 타도!” 35년 전인 1986년 5월 3일 주안. ‘인천시민회관’ 앞 광장은 물론이고 사거리 도로까지 점거한 군중들의 함성이 인천 하늘에 메아리쳤다. 재야운동가, 노동자, 학생들로 이뤄진 5만여 명의 인파 속에서 ‘군사 독재 타도, 민중 생존권 확보, 미일 외세 축출’ 구호가 터져 나왔다. 1985년 2·12 총선에서 ‘직선제 개헌’ 공약으로 돌풍을 일으킨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이 되면서 ‘개헌추진위 인천·경기지부 결성대회 및 현판식’을 갖기로 한 날이었다. 그런데 행사 2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더니 순식간에 민주항쟁 들불로 타올랐다. 5·3항쟁은 이듬해 6월항쟁에 불을 댕겨 ‘대통령 직선제’와 ‘언론 자율화’를 이끌어낸다. 이날 행사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최대의 민주화운동으로 기록됐다.인천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개항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노동운동이 출발이었다. 일제의 쌀 공출에 따른 정미업으로 시작된 인천의 산업화는 점차 제염, 양조, 경공업으로 확장된다. 1912년 비누 공장 애경사, 1917년 성냥 공장 조선인촌주식회사, 1925년엔 열차를 제작하는 인천공작창 같은 크고 작은 공장들이 문을 열었다. 때맞춰 조선노동공제회 인천지회(1920)와 인천소성노동회(1923)가 결성되면서 노동운동은 조직화하기 시작
2021-04-30 2021년 5월호
- 자료관리담당자
-
-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2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