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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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에 비친 인천 ③ 영종도
바다와 하늘 사이, 그 섬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박상희 화가의 손끝에서 피어난 바다와 하늘 사이의 섬, 영종도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 영종성당 옆 민재네 할머니 댁 종이 위에 수채화_36x25.5cm_2020박상희 작가의 아들 친구 민재의 영종도 할머니 댁. 꽃구름 둘러싸인 집에서 할머니가 버선발로 나와 반길 것만 같다. 영종성당 앞, 할머니 집 민재네 할머니 댁은 영종도에 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여섯 형제도 이 섬에서 나고 자랐다. “벚꽃 필 때 오지 그랬어.” 영종성당 바로 앞에 있는 할머니 집은 사시사철 예쁘다. 봄이면 노랑, 빨강, 하양 꽃망울이 터지고, 여름이면 싱그러운 풀숲이 대지를 덮는다. 겨울 햇살마저 따사롭다. 그래도 할머니는 뭍에서 온 손님들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왔으면 더 좋으련만 싶다.차이분(93) 할머니는 영종도 토박이다. 나이가 아흔이 넘도록 섬을 떠나 산 적이 없다. 할머니 집은 2006년에 지어졌다. 살던 동네에 개발의 바람이 불고 ‘하늘도시’가 들어서면서 이리로 떠밀려 왔다. 떠나야 했지만, 멀리 가고 싶진 않았다. 가족이 다니던 성당 가까이 양지바른 자리에, 허물어가던 집을 사들여 추억을 다시 지었다.마을은 사라졌지만,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고만고만한 초가집들이 모여 있던 동네였다. 섬사람들은 뱃일을 하거나, 곡식이고 과일을 키
2021-03-02 2021년 3월호 -
소소한 인천사
인천 지명꽃도 없고 섬도 아닌 ‘화도진’화수동에 있는 화도진은 1866년 병인양요 이후 거듭된 외국 함대의 침입에 대비해 고종 16년(1879)에 설치한 군사 기지다. 그때 인천의 북쪽을 맡을 바닷가 군사 기지로 지금의 서구 연희동에 연희진이 생겼고, 남쪽을 맡을 기지로 이곳 화도진이 생겼다. 당시 화도진이 관할한 해안포대는 모두 8개로, 가장 규모가 큰 주안갯골 입구에 6개의 포대를 배치했다. 또 승기갯골과 소래갯골에 각각 호구포대와 장도포대를 설치했다. 이를 통해 지금 만석동의 괭이부리와 북성포, 제물포, 범아가리(호구포) 등지의 바다를 지켰다. 연희진은 지금의 연희동과 원창동, 가좌동 일대의 포대를 담당했다. 당시 서울로 들어가려는 배는 반드시 인천 앞바다를 거쳐야만 했기 때문에 이곳에 군사 방어 시설을 만든 것이다. 그때 조정에서는 어영대장 신정희를 보내 포대와 군영을 만든 뒤 화도진이라 이름을 붙였다. 당시 화도진은 남북 방향으로 향하는 언덕 지대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진지에서는 바다를 잘 바라볼 수 있지만 바다 쪽에서는 진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군사 시설로는 최적의 위치에 자리 잡고 있던 셈이다.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화도진은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는데, 1930년대에 와서는 소나무 숲이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 ‘화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아마도 당시 이곳이 ‘꽃섬’이라 불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꽃섬’을 한자로 바꾸다 보니 ‘화도花島’가 되었다. 하지만 ‘화도’, 즉 ‘꽃섬’은 사실 꽃이나 섬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생긴 이름이다. 이곳은 땅 모양이 육
2021-03-02 2021년 3월호 -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⑩ 송도고등학교
새로운 100년 역사를 향해 가는 길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열 번째 등굣길을 따라 옥련동 비탈길을 오른다. 오래된 송도에서, 멀리 새로운 송도를 굽어보듯 자리한 송도고등학교. 한 세기가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그곳을 한국 농구의 전설 유희형(47회 졸업) 전 KBL 심판위원장과 함께 걸었다.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남다른 교육이 탄생시킨 농구 명문184cm. 훤칠한 키의 남성이 학교에 들어선다. 초창기 한국 농구 스타플레이어의 계보를 이었던 유희형이다. 올해 74세라는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역시나 농구 코트다. 송도체육관. 손자뻘 되는 후배들이 구슬땀을 흘리는 한국 농구의 산실이다. “내가 운동할 때만 해도 체육관 같은 건 꿈도 못 꿨어. 교실 6개를 이어붙여 체육관으로 만들었지. 여름엔 쌀과 이불을 가져와 함께 먹고 자며 훈련했어. 그런데도 그렇게 성적이 좋았다고.”유희형은 한국 농구의 가장 눈부셨던 시절을 함께했다. 송도중학교 3학년 시절 모교를 사상 처음 전국대회 1위에 올려놨던 그는 1968년 국가대표에 선발되며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주전 선수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득점 기계 신동파, 농구 천재 김영일뿐만 아니라 당시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던 이인표, 김영기가 버티고 있었다. 남은 한 자리가 바로 최연소 국가대표 유희형이었다.“내 농구 인생과 송도고 농구부에는 은인이 한 분 있어. 고故 전규삼 선생님이야. 송도고가 개성에 있을 때부터 교사로 재직하셨는데, 만능 스포츠맨이었어.
2021-03-02 2021년 3월호 -
인천 문화재 이야기 ③ 인천우체국
‘100년의 사연’들이 거쳐간 동·서양 혼합 근대건축물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중구 신포사거리 인천항 방면 모퉁이의 육중한 건물이 겨울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정문에 붙은 ‘인천중동우체국 이전 안내’란 플래카드가 가볍게 펄럭인다. 여느 건물과는 달리 정문이 사거리 방면 건물 모서리에 나 있는 것이 독특하다. 정문 위 화강암엔 ‘인천우체국’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거칠게 다듬은 화강암을 기단처럼 처리하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올린 2층 벽돌조의 이 건물은 1923년 완공한 ‘인천우체국’(중구 항동6가 1)이다. 2003년 인천우체국이 연수구 신청사로 이전한 뒤 중·동구 지역을 관할하는 ‘인천중동우체국’이 들어왔고, 인천중동우체국마저 2019년 5월 신흥동 정석빌딩으로 이전하면서 지금은 비어 있는 상태다. 1982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인천우체국은 그리스 양식의 원형 기둥과 르네상스 양식을 절충한 모습으로 건축한 인천의 대표적 근대건축물이다.개항 이듬해인 1884년 11월 17일 서울엔 우정총국, 인천엔 분국이 설치된다. 누구나 자유롭게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근대적 통신 제도의 시작이었다. 당시 인천분국장엔 월남 이상재 선생이 임명됐으며 최초의 우표인 문위文位 우표도 발행했다. 인천감리서 안에 두었던 인천분국에서 스탬프를 찍은 것도 잠시, 12월 4일 우정총국 개업 축하연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은 한 달도 못 가 폐쇄된다. 우편 행정이 재개된 때는 11년 뒤인 1895년이다. 이때 서울과 인천에 우체사를 두었는데 인천우체사의 관할 지역은 제물포항 일대와 인천 읍내였다. 인천우체사와 서울우체사에서
2021-03-02 2021년 3월호 -
인천의 아침
김란사와 유관순, 그리고 인천 여성글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신문사에 근무하던 2015년, 초로의 남자가 자료를 잔뜩 들고 찾아왔다. 하란사란 여성 독립운동가의 친정 조카손자라고 소개한 그는 “고모할머니의 성은 하 씨가 아닌 김 씨이며, 본관도 김해가 아닌 전주인데 잘못 알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그의 주장대로 기록이 중구난방이었다. 몇 차례에 걸친 보충 취재 뒤 이듬해 초 특집 기사를 출고했다. 6년이 흐른 지난 2월, 그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행정안전부, 국가보훈처 등 정부 부처와 포털사이트 등의 기록을 바로잡고 훈장도 새로 받았다고 했다. 1872년 평양 출신인 김란사가 인천에 정착한 때는 1893년 인천별감 하상기와 결혼하면서다. 이때 김란사의 남동생이 함께 중구 유동 2번지에 뿌리를 내렸는데 제보자 김용택(74) 씨는 남동생의 친손자로 인천 사람이었다. 김란사 일가는 지금도 인천 시민으로 살고 있다. 김란사는 교육을 향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결혼 이듬해인 1894년 김란사는 이화학당을 찾아간다. 공부를 하고 싶다는 김란사를 마주한 미국 선교사 출신 룰루 프라이 학당장은 그러나 입학을 불허한다. 금혼 학칙에 따라 미혼이어야 하는데 김란사는 기혼인데다 딸(하원옥)까지 있던 터였다. 김란사는 이때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입으로 불어 끄며 “우리가 캄캄하기를 이 등불 꺼진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들이 무언가 배우고 알아야 자식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호소, 마침내 학당 학생이 된다. 그로부터 21년 뒤 유관순이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생으로 들어온다. 김란사는 이때 이화학당 총교사(교감)로 재직 중이었다. 학생자치단체 이
2021-03-02 2021년 3월호 -
포토에세이-102년 전, 3월 황어장터
1919년 3월 24일 오후 계양구 장기동 황어장에 나왔던 한 사내가 날카롭게 외쳤습니다.“대한독립만세!”그는 오류리에 사는 독립운동가 심혁성(1888~1958)이었습니다.장터에서 소를 팔고 사던 600여 사람들이 함께 함성을 터뜨렸습니다.“대한독립만세! 만세! 만세!….”그렇게 황어장터에선 인천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습니다.한 세기가 지나 격렬했던 독립운동의 현장은 고즈넉한 시민공원이 되었습니다.102년 전, 선열들의 뜻을 이어 지금의 평화를 잘 지켜가야겠습니다.글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2021-03-02 202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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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업데이트 202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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