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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점자의 날 특집 : 송암 박두성의 발자취를 찾아

2025-11-04 2025년 11월호

육화六花, 세상을 밝힌 여섯 송이 꽃

 

글. 임성훈 본지 편집장   사진. 김성재 포토디렉터


 


육화 六花. 한글 점자에 사용된 여섯 개 점을 여섯 개의 꽃봉오리에 빗댄 말이다.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 선생이 조직한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의 또 다른 이름(육화사六花社)이기도 하다. 내년이면 그 여섯 송이 꽃이 피어난 지 100년이 된다. 99년 동안 그 꽃봉오리들은 시각장애인에게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였다. 작은 꽃 하나하나가 배열과 조합을 거치며 문자가 되고, 말이 되고, 세상이 되었다. 시각장애인의 손끝은 그 꽃을 더듬어 세상을 만질 수 있게 됐다. 아름답고도 뜨거운 꽃이다.

그러나 그 꽃봉오리에서 풍기는 향은 단순한 꽃내음이 아니다. 고뇌와 번민, 꿈과 희망이 뒤섞인 인간의 냄새가 꽃잎 한장 한장에 짙게 배어있다.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세모꼴, 사다리꼴을 알려주기 위해 판자로 모형을 만들다 톱에 베여 선지피를 흘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불을 끈 채 눈을 가려 점자를 더듬던 밤은 수없이 이어졌다. 몸을 혹사해 실명 위기에 처하면서도 불행한 이들의 눈을 밝히고자 했던 한 선각자의 치열한 삶이 그 꽃의 자양분이 됐다.


‘점자의 날’은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송암이 한글점자인 ‘훈맹정음訓盲正音 ’을 세상에 내놓은 1926년 11월 4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훈맹정음 반포 100주년을 1년여 앞두고 훈맹정음 창안자 송암 박두성 선생의 흔적을 따라가 보았다. 100이라는 숫자가 완성을 의미한다면, 아직 두 자리에 머문 99에는 채워지지 않은 여백이 있을 것이다. 위대한 업적의 그림자 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영역을 찾아 송암의 생가를 비롯해 송암박두성기념관과 송암점자도서관, 그리고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거쳤다. 송암의 발자취는 곳곳에 씨줄 날줄로 엮여있었다. 그 여정에서 발견한 ‘나머지 1’의 의미는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점자판 구멍마다 피땀괴인 임의 정성, 

어두운 가슴마다에 광명을 던지셨소. 

이 아침 천국에서도 같이 웃으시리라. 

남의 불행 건지려고 자기 행복 버리신 임. 

한숨을 돌이켜서 입마다 노래소리.

그 공덕 잊으리까 영원한 칭송 받으소서. 

-노산 이은상-




<송암 박두성 발자취>

1888  송암 출생(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1911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에게 송암 호 받음.

1913   제생원 맹아부 발령, 한국 최초의 점자 교과서(일본어 점자) 출판 

1919   천자문 점역 제판 완성

1921   조선맹아협회 조직, 한글 3.2점식 점자 완성 

1923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 조직, 훈맹정음 연구 시작 

1926  훈맹정음 반포

조선어점자연구회를 육화사로 개칭

1927  육화사를 조선맹인사업협회로 개칭

1936  인천 영화학교 교장 부임

1940  조선맹아사업협회 조직, 점자통신교육 시행 

1941   신약성서 점자 원판 제작 완성

1945  인천 시각장애인 회람지 ‘촉불’ 발간

1957  신구약성서 점역 완성 전24권

1962  국민포장 수상

1963  서거, 인천시 남동구 수산동에 안장

1992  은관 문화훈장 추서

2002 문화관광부 4월의 문화인물로 선정

2008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예술 대표인물로 선정


교동도에 있는 송암 박두성 선생의 생가


송암박두성기념관에는 그가 사용하던 다양한 점자도구가 전시되어 있다.



송암의 발자취를 찾아 

흔적 1- 송암 박두성 생가, 사랑이 시작된 곳 


인천에는 시각장애인들의 성지聖地가 있다. 북녘땅과 마주한 섬, 교동도 달우물마을(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8번지)의 한 초가집, 바로 송암 박두성 선생의 생가다. 교동대교 를 건너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 오솔길로 접어들면, 바다 건너 강화 본도와 석모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한적한 곳에 그 집이 있다. 이 섬마을 초가집에서 송암은 첫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1888년 4월 26일 농부 박기만의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온 가족이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생가 근처에는 송암이 다니던 낡은 교회 건물이 남아있다. 훗날 꽃피우는 송암의 교육철학과 시각장애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기독교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교회다.

생가는 가난했던 시절의 절절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소년 박두성은 8살 때 물 건너 강화도의 보창학교에 입학해 4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다. 졸업 후 집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거들었는데 극심한 가뭄으로 가족이 생계 위기에 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는 외국으로 나가 돈을 벌고 공부도 하겠다는 생각으로 가족 몰래 일본으로 가는 상선에 올랐다. 하지만 장남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일본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두 달 만에 인천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초췌한 모습의 아버지와 극적으로 마주쳤다. 제대로 먹지 못한 아버지는 부황을 앓아 누렇게 뜬 얼굴로 행방이 묘연해진 아들을 찾아 부둣가를 헤매던 중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다시 고향에 돌아온 박두성은 밤낮으로 책을 읽고, 학문에 매진했다. 이후 한성사범학교로 유학을 떠나 졸업과 동시에 어의동 보통학교에서 8년간 교사로 재직했다. 그의 평생을 이끈 ‘교육과 봉사’의 길은 이때 시작됐다. 

2021년에 복원된 생가에는 송암의 흉상, 어록과 함께 점자 체험물이 전시되어 있다. 벽면의 점자를 손끝으로 따라가다 보면 마음속에 또 다른 문자의 세계가 열린다. 


가을 빛을 머금은 박두성 선생 생가에서 바라본 풍경



흔적 2- 송암박두성기념관, 점자에 생명을 불어넣다. 

“능숙한 목수는 상한 나무도 버리지 않는다.” ‘송암박두성기념관’(인천시 미추홀구 한나루로 357번길)에 들어서면 점자로 표현한 송암의 모자이크 초상과 어록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기념관 안에는 점자타자기와 제판기, 로울러 등 송암의 손때가 묻은 전시품이 가득하다. 특히, 현존하는 유일한 점자회람지로, 광복과 함께 발행된 ‘촉불’(88호)은 숙연함마저 안겨준다. 어둠을 환하게 밝혀준다는 뜻의 이 점자회람지를 통해 송암은 세상을 그들의 손끝에 전달하고자 했다.

송암이 시각장애인 교육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13년 1월 제생원 맹아부(현 국립 맹盲학교)에서 근무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박두성은 한글점자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특히 일본 점자 기념일(11월 1일)을 맞을 때면 박두성의 한탄은 커지기만 했다. ‘앞 못 보는 것도 서러운데 한국 시각장애인이 일본 점자로 교육을 받다니….’

박두성은 평양의 평양여자맹아학교에서 사용하던 4점식  자를 연구하기도 했으나 한글에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직접 한글점자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당시는 일본제국주의가 한글 사용을 금기시하던 서슬 퍼런 시기였다.

송암은 1921년 3월 ‘3·2점식 점자’를 완성한 데 이어 1923년 4월에는 세종대왕이 만든 집현전의 언문청을 모델로 ‘조선어점자연구회’를 비밀리에 조직했다. 앞서, 한글의 원리부터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한글 창제 과정을 철저히 연구한 터였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한글점자 연구에 착수해 3년여 뒤인 1926년 11월 4일 63개 한글점자의 ‘훈맹정음’을 세상에 내놓았다. 

훈맹정음 반포 후 송암이 가장 먼저 한글점자로 옮긴 책은 성경이었다. 그는 집안에 점자번역기 아연판까지 설치해 놓고 남은 생을 밤낮으로 한글점자 점역과 시각장애인 통신교육에 매달렸다. 

훈맹정음 창안 때와 신약 점역 때 밤새워 작업을 하다 실명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그는 끝까지 점자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송암은 1963년 8월 25일 영원히 눈을 감았다. 향년 76세. 눈 을 감기 직전 그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점자책…. 쌓지 말고 꽂아….”

눈을 감는 순간에도 출문자인 점자의 돌출부가 압력을 받아 납작해져 읽을 수 없게 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 전시된 박두성 선생이 쓴 한글점자 원고


훈맹정음 상설전시관 내부



흔적 3-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세계에 전하는 한글점자의 우수성 

지난 2023년 송도국제도시에서 문을 연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상설전시실에는 특별한 전시관이 있다. 유일한 점자 전시관인 훈맹정음관이다. 전시관에는 송암이 직접 쓴 한글점자 설명서와 원고, 시각장애인 양정신이 박두성에게 보낸 점자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비록 전시품이 많지는 않지만, 디지털기기의 도움을 받아 훈맹정음의 탄생 과정, 한글점자의 우수성을 체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인천에 들어서는 데 송암이 한몫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세계문자박물관의 적격지 선정 과정에서 송암의 고향이라는 점이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발자취 위에 세워진 이 박물관은 이제 인류 문자문화의 중심에서 인천의 이름을 빛내고 있다.


100여 년 전 꽃망울을 터뜨린 여섯 개의 점.

그 6개의 점은 지금도 시각장애인의 손끝에서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육화는 단지 점자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의 증거이자 인간 존엄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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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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